“명석하고 매력적” VS “언론관계에 둔감”
베를린에서 오랫동안 관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특파원 생활을 했던 나는 1950년 5월 뉴욕 헤럴드 트리뷴 극동지국장으로 도쿄에 부임하자마자 충격적인 일을 경험했다. 대다수의 도쿄 특파원들이 맥아더 장군과 그 참모들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갖고 있었고, 반대로 맥아더 사령부도 특파원들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해 있었다.
맥아더와 언론 간의 적대감이 생기게 된 가장 주요한 이유는 맥아더 장군이 실제로 특파원들은 거의 만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특파원들은 오만방자한 맥아더로부터 무시당하고 있다며 분개했다. 특파원들의 맥아더에 대한 적개심은 알게 모르게 본국의 편집자들에게 전달됐다.
내가 미국에서 만나본 언론사 편집자들은 맥아더를 알지도, 그와 얘기를 나눠보지도 않았음에도 맥아더를 ‘극도의 이기주의자’ ‘독재자’ ‘비인간적이고 고리타분한 군인’ 등으로 묘사했다.
맥아더 장군에 대한 나의 판단은 전혀 다르다. 나는 부임 직후, 즉 6·25전쟁이 발발하기 1개월 전 맥아더와 최초의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본사로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오늘 나는 맥아더 원수와 2시간에 걸친 대화를 했다. 너무 너무 인상적이었다. 내가 만나 본 인물들 중에서 그는 군사 분야는 물론 국제정치 분야에서 가장 명석하고 가장 박식한 견해의 소유자였다. 그는 솔직했고 매력적이었으며, 잘난 체하고 거드름 피우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맥아더는 철저한 성격 소유자
6·25전쟁 발발 수일 후 맥아더는 나를 수원에서 일본으로 가는 그의 전용기에 태워 준 적이 있다. 그렇지 않아도 맥아더와의 관계가 불편했던 특파원들에게는 입방아 찧을 좋은 기회였다. 그래서 나는 맥아더에게 간단한 메모를 보냈다. 나와 사진기자 데이비드 던컨을 전용기에 탑승시켜 준 것이 다른 특파원들의 분노를 촉발시키지 않았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맥아더는 즉시 메시지를 보내왔다. “당신을 시기하는 남성 특파원들이 당신에게 뭐라고 하든지 신경쓰지 말아요. 나는 그들을 당신보다 많이 알아요. 그들은 4년 반이나 나를 괴롭혔다오.”
내가 맥아더 장군과의 관계에서 좋은 출발을 한 것은 첫째는 미 전쟁부의 차관이 나에 대한 훌륭한 소개서를 맥아더에게 보내준 덕분이고, 둘째는 내가 그와의 인터뷰 후 송고한 일련의 기사들이 그의 입장과 견해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인터뷰 중에 “이 점을 확실히 이해하고 있어요?” “내가 말하려는 것을 알아들었나요?” 등과 같이 누차 확인하는 철저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맥아더 장군의 이른바 뻣뻣하고 잘난 체한다는 세간의 평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사건의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1950년 9월 29일 서울에서 개최된 기념행사가 그것이다. 성공적인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을 기념하는 행사였다. 행사는 거대한 중앙청 건물에서 개최됐다.
나는 평생 한 장소에 그렇게 많은 장성이 운집한 것을 본 적이 없다. 행사장은 눈부시게 반짝이는 별들의 잔치였다. 이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 미국·한국·영국·프랑스의 장성들이 도쿄·오키나와·호놀룰루, 심지어 워싱턴에서 날아왔다. 이날 실제로 전투에 참전했던 미 해병대 제1사단 장병들과 특파원들은 본부석과는 저 멀리 떨어져 있었고 가능한 한 눈에 띄지 않으려고 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바로 하룻밤 전에 끝난 치열했던 전투에 지쳐 있었고, 입고 있던 옷들이 너무도 더러웠기 때문이었다.
기념행사는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시 기념 열쇠를 맥아더 장군에게 증정하고, 주기도문을 읽었을 때 최고조에 달했다. 그리고 맥아더 장군은 빛나는 별들이 반짝이는 제복을 입은 그 많은 고위 장교와 단상을 내려와서 가운데 통로를 따라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내 몰골이 너무 형편 없음을 알고 행사 중 내내 나는 될 수 있으면 그를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가까이 오는 순간 나도 모르게 불현듯 그를 축하해 줘야 한다는 마음이 일었다. 그래서 그에게 외쳤다.
“헤이, 원수님, 승리를 축하해요.” 맥아더 장군은 군중들 사이를 쳐다보더니 나를 발견하고 대꾸했다.
“이봐요. 키 크고 금발의 못생긴 여자, 언제 한 번 와서 봅시다.” 그러자 각국의 장군들, 특히 맥아더 주변의 미군 장성들의 얼굴에는 내가 전에는 전혀 보지 못했던 놀라움과 즐거움이 교차했다. 그 순간 나는 영사기를 갖고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한 달 후 나는 뉴욕 헤럴드 트리뷴 연례 포럼의 초청을 받았다. 6·25전쟁과 동북아 정세에 관해 연설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연설을 준비하면서 맥아더 장군의 “언제 한 번 와서 봅시다”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 당시의 영웅과의 인터뷰가 너무도 유용할 것 같아서였다.
그때 우리 군대는 38선을 넘어 북진하고 있었으며, 맥아더도 미 합참도 중국 공산주의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었다. 만약 중공군이 개입하는 사태가 벌어지면 그들은 공군력을 사용해 만주에 대한 전면 폭격을 감행함으로써 적의 전투력을 잃게 한다는 계획을 수립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들은 트루먼의 정치적 결정으로 최후의 순간에 거부됐다.
아무튼 나는 뉴욕으로 출발하기 전 맥아더 사령관을 만나려고 여섯 차례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그의 부관은 매번 거절했다. 내가 맥아더의 블랙리스트에 포함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화가 치민 나는 부관에게 전화로 쏘아붙였다. “맥아더 장군에게 내 말을 있는 그대로 전해 주세요. 히긴스 기자가 장군이 한 달 전에 서울에서 한 군사명령을 따르려 한다고 말입니다. 그 명령이란 ‘언제 한 번 와서 봅시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나의 메시지가 맥아더 장군에게 전달된 것은 그날 오후 3시 반이었는데, 5분도 안 돼 부관이 허겁지겁 내게 연락해 왔다.
“장군님이 아무 때라도 기꺼이 기자님을 만나시겠답니다.” 나는 인터뷰를 했고 연례포럼에도 성공적으로 참가할 수 있었다.
트루먼, 맥아더 해고 속내 밝혀
한편 나는 기자로서 수많은 관리를 만나봤지만 언론과의 관계에서 트루먼 대통령같이 둔감한 인물을 접해 본 적이 없다고 확실히 말하고 싶다. 1951년 7월, 나는 백악관에서 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맥아더 원수는 내가 트루먼과의 인터뷰를 갖기 3개월 전에 벌써 해고됐다. 나를 만난 트루먼은 자신이 해고시킨 맥아더에 대한 그의 속마음을 주저하지 않고 드러냈다. 맥아더 장군에 대한 트루먼의 발언은 6·25전쟁에서 맥아더 장군의 군사전략이 옳았다고 생각한다는 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왔다.
“자, 보세요.” 트루먼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맥아더 그 사람에 대해서 좀 얘기해야겠어요. 그는 허영심으로 가득 찬 인간이에요. 그게 전부입니다. 항상 거들먹거려요. 늘 폼만 잡는 인간이랍니다. 그가 그렇게 많은 시간 동안 거들먹거리지 않고, 본업에만 조금 더 충실했어도 나는 그를 해고시키지 않았을 겁니다.”
다음 계속
종군기자들과 인터뷰 중인 맥아더 장군. / 6·25전쟁 기간 중 연설하는 트루먼 대통령. |
베를린에서 오랫동안 관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특파원 생활을 했던 나는 1950년 5월 뉴욕 헤럴드 트리뷴 극동지국장으로 도쿄에 부임하자마자 충격적인 일을 경험했다. 대다수의 도쿄 특파원들이 맥아더 장군과 그 참모들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갖고 있었고, 반대로 맥아더 사령부도 특파원들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해 있었다.
맥아더와 언론 간의 적대감이 생기게 된 가장 주요한 이유는 맥아더 장군이 실제로 특파원들은 거의 만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특파원들은 오만방자한 맥아더로부터 무시당하고 있다며 분개했다. 특파원들의 맥아더에 대한 적개심은 알게 모르게 본국의 편집자들에게 전달됐다.
내가 미국에서 만나본 언론사 편집자들은 맥아더를 알지도, 그와 얘기를 나눠보지도 않았음에도 맥아더를 ‘극도의 이기주의자’ ‘독재자’ ‘비인간적이고 고리타분한 군인’ 등으로 묘사했다.
맥아더 장군에 대한 나의 판단은 전혀 다르다. 나는 부임 직후, 즉 6·25전쟁이 발발하기 1개월 전 맥아더와 최초의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본사로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오늘 나는 맥아더 원수와 2시간에 걸친 대화를 했다. 너무 너무 인상적이었다. 내가 만나 본 인물들 중에서 그는 군사 분야는 물론 국제정치 분야에서 가장 명석하고 가장 박식한 견해의 소유자였다. 그는 솔직했고 매력적이었으며, 잘난 체하고 거드름 피우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맥아더는 철저한 성격 소유자
6·25전쟁 발발 수일 후 맥아더는 나를 수원에서 일본으로 가는 그의 전용기에 태워 준 적이 있다. 그렇지 않아도 맥아더와의 관계가 불편했던 특파원들에게는 입방아 찧을 좋은 기회였다. 그래서 나는 맥아더에게 간단한 메모를 보냈다. 나와 사진기자 데이비드 던컨을 전용기에 탑승시켜 준 것이 다른 특파원들의 분노를 촉발시키지 않았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맥아더는 즉시 메시지를 보내왔다. “당신을 시기하는 남성 특파원들이 당신에게 뭐라고 하든지 신경쓰지 말아요. 나는 그들을 당신보다 많이 알아요. 그들은 4년 반이나 나를 괴롭혔다오.”
내가 맥아더 장군과의 관계에서 좋은 출발을 한 것은 첫째는 미 전쟁부의 차관이 나에 대한 훌륭한 소개서를 맥아더에게 보내준 덕분이고, 둘째는 내가 그와의 인터뷰 후 송고한 일련의 기사들이 그의 입장과 견해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인터뷰 중에 “이 점을 확실히 이해하고 있어요?” “내가 말하려는 것을 알아들었나요?” 등과 같이 누차 확인하는 철저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맥아더 장군의 이른바 뻣뻣하고 잘난 체한다는 세간의 평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사건의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1950년 9월 29일 서울에서 개최된 기념행사가 그것이다. 성공적인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을 기념하는 행사였다. 행사는 거대한 중앙청 건물에서 개최됐다.
나는 평생 한 장소에 그렇게 많은 장성이 운집한 것을 본 적이 없다. 행사장은 눈부시게 반짝이는 별들의 잔치였다. 이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 미국·한국·영국·프랑스의 장성들이 도쿄·오키나와·호놀룰루, 심지어 워싱턴에서 날아왔다. 이날 실제로 전투에 참전했던 미 해병대 제1사단 장병들과 특파원들은 본부석과는 저 멀리 떨어져 있었고 가능한 한 눈에 띄지 않으려고 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바로 하룻밤 전에 끝난 치열했던 전투에 지쳐 있었고, 입고 있던 옷들이 너무도 더러웠기 때문이었다.
기념행사는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시 기념 열쇠를 맥아더 장군에게 증정하고, 주기도문을 읽었을 때 최고조에 달했다. 그리고 맥아더 장군은 빛나는 별들이 반짝이는 제복을 입은 그 많은 고위 장교와 단상을 내려와서 가운데 통로를 따라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내 몰골이 너무 형편 없음을 알고 행사 중 내내 나는 될 수 있으면 그를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가까이 오는 순간 나도 모르게 불현듯 그를 축하해 줘야 한다는 마음이 일었다. 그래서 그에게 외쳤다.
“헤이, 원수님, 승리를 축하해요.” 맥아더 장군은 군중들 사이를 쳐다보더니 나를 발견하고 대꾸했다.
“이봐요. 키 크고 금발의 못생긴 여자, 언제 한 번 와서 봅시다.” 그러자 각국의 장군들, 특히 맥아더 주변의 미군 장성들의 얼굴에는 내가 전에는 전혀 보지 못했던 놀라움과 즐거움이 교차했다. 그 순간 나는 영사기를 갖고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한 달 후 나는 뉴욕 헤럴드 트리뷴 연례 포럼의 초청을 받았다. 6·25전쟁과 동북아 정세에 관해 연설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연설을 준비하면서 맥아더 장군의 “언제 한 번 와서 봅시다”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 당시의 영웅과의 인터뷰가 너무도 유용할 것 같아서였다.
그때 우리 군대는 38선을 넘어 북진하고 있었으며, 맥아더도 미 합참도 중국 공산주의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었다. 만약 중공군이 개입하는 사태가 벌어지면 그들은 공군력을 사용해 만주에 대한 전면 폭격을 감행함으로써 적의 전투력을 잃게 한다는 계획을 수립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들은 트루먼의 정치적 결정으로 최후의 순간에 거부됐다.
아무튼 나는 뉴욕으로 출발하기 전 맥아더 사령관을 만나려고 여섯 차례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그의 부관은 매번 거절했다. 내가 맥아더의 블랙리스트에 포함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화가 치민 나는 부관에게 전화로 쏘아붙였다. “맥아더 장군에게 내 말을 있는 그대로 전해 주세요. 히긴스 기자가 장군이 한 달 전에 서울에서 한 군사명령을 따르려 한다고 말입니다. 그 명령이란 ‘언제 한 번 와서 봅시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나의 메시지가 맥아더 장군에게 전달된 것은 그날 오후 3시 반이었는데, 5분도 안 돼 부관이 허겁지겁 내게 연락해 왔다.
“장군님이 아무 때라도 기꺼이 기자님을 만나시겠답니다.” 나는 인터뷰를 했고 연례포럼에도 성공적으로 참가할 수 있었다.
트루먼, 맥아더 해고 속내 밝혀
한편 나는 기자로서 수많은 관리를 만나봤지만 언론과의 관계에서 트루먼 대통령같이 둔감한 인물을 접해 본 적이 없다고 확실히 말하고 싶다. 1951년 7월, 나는 백악관에서 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맥아더 원수는 내가 트루먼과의 인터뷰를 갖기 3개월 전에 벌써 해고됐다. 나를 만난 트루먼은 자신이 해고시킨 맥아더에 대한 그의 속마음을 주저하지 않고 드러냈다. 맥아더 장군에 대한 트루먼의 발언은 6·25전쟁에서 맥아더 장군의 군사전략이 옳았다고 생각한다는 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왔다.
“자, 보세요.” 트루먼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맥아더 그 사람에 대해서 좀 얘기해야겠어요. 그는 허영심으로 가득 찬 인간이에요. 그게 전부입니다. 항상 거들먹거려요. 늘 폼만 잡는 인간이랍니다. 그가 그렇게 많은 시간 동안 거들먹거리지 않고, 본업에만 조금 더 충실했어도 나는 그를 해고시키지 않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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