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병철 삼성회장은 아마추어 골퍼임에도 지독한 ‘연습광’이었다.
이 회장이 안양CC(현 안양베네스트GC)에서 라운드를 마치면 오후 3∼4시쯤 됐다.
이 회장은 그날 라운드에서 잘 안되면 연습장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연습에 몰두했다.
당시 볼을 담은 박스가 나무 상자였는데 한 박스에 24개 정도가 들어갔다.
이 회장은 보통 15∼20상자를 쳤다.
336개에서 480개 정도니까 상당한 연습량이라 할 수 있다.
오죽하면 당시 이 회장 레슨을 맡았던 한장상 프로는 “아마추어인 이 회장님도 저렇게 열심히
연습하는데.... 프로인 나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더 열심히 연습을 하곤 했다”고 회고했다.
이 회장은 키 167cm에 몸무게 57kg, 신발 사이즈 245mm로 크지 않은 체격이지만 외모는
단단하고 야무졌다.
한장상 프로 말에 따르면 한 번도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모습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항상 단정한
모습을 유지했다고 한다.
특히 골프매너가 훌륭했다.
티오프 시간에 결코 늦은 적이 없었다.
대부분 남보다 먼저 와서 기다렸다.
그만큼 시간 개념이 철저해 주위에서는 이 회장을 “칸트와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 또 아무리
많은 비가 와도 일단 골프장에 나온 뒤 라운드를 할 지, 안할 지를 결정했다.
이 회장은 국내 최초의 골프장인 서울컨트리클럽이 1954년 생기기전부터 일본 유명
프로골퍼들로부터 일찌감치 골프를 배웠다.
이 회장은 골프를 대충 치지 않았다. 스윙의 기본 원칙을 철저히 익혔다.
이 회장은 골프의 장점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회사 직원들에게 골프를 권하고 골프 룰이나
매너를 배우도록 했다.
삼양통상 회장이던 허정구씨가 삼성물산 사장으로 있던 시절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마추어
대회에 출전할 때도 회사일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갔다 오도록 배려했다.
이 회장은 홀인원을 3차례 기록했다.
맨 처음은 79년 5월13일 안양CC 13번홀(184야드)에서 5번 우드로 잡았다.
81년 11월22일에는 역시 안양CC 17번홀(148야드)에서 6번 아이언으로 홀인원을 낚았다.
세번째는 일본 골프장에서 기록했다.
고 이병철 삼성회장은 골프를 해보면 그 사람의 인격을 바로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 회장은 스코어를 속이거나 거짓말하는 사람,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 대해 매우
엄격했다.
예절을 지키지 않고 고성을 내거나 목욕탕에서 누워자는 등 골프장 분위기를 흐리는 사람은 두 번
다시 상대하지 않았다.
이 회장은 골프는 신사도가 기본이라고 자주 말했다.
지켜야 할 것은 지키고 남에게 누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회장은 라운드에 들어가면 연습스윙을 전혀 하지 않았다.
티샷은 티를 꽂은 뒤 바로 날렸다.
페어웨이나 그린에서도 연습스윙없이 곧바로 샷을 했다.
이 회장은 “골프를 할 때 남이 날 기다리는 것은 폐를 끼치는 것”이라며 항상 바로 샷을 하는 습관이
돼 있었다.
이 회장은 라운드가 끝나면 그날 가장 잘 친 베스트샷과 잘못 친 워스트샷 딱 두 가지만 기억했다.
잘못된 샷은 실패도 자산이라는 생각으로 기억했다.
이 회장은 어프로치샷과 퍼팅, 벙커샷은 드라이버샷과 달리 철칙과 요령이 있다고 설명하면서 사업도
그와 마찬가지로 요령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회장은 그래서인지 쇼트게임을 무척 잘해 그린 주변에서 스코어를 많이 줄였다.
이 회장은 사업상 경쟁자였던 당시 정주영 현대 회장에게 골프에서 지는 것이 아주 싫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 회장은 골프에서 이기고 싶은 사람은 꼭 이기려고 했지만 즐겁게 치고 싶은 사람과는
즐기면서 골프를 쳤다.
자신의 골프를 컨트롤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이 회장은 일본의 재계 학계 정계 인사들과 자주 라운드를 했다.
그 중에는 일본 총리를 지낸 분을 포함, 거물급 인사들이 많았다.
이 회장은 당시 일본의 초명문 골프장인 스리헌드레드(300)CC의 유일한 한국인 회원이었다.
나중에 정주영 회장도 회원이 됐다.
300은 회원수가 300명이라는 뜻이다.
스리헌드레드CC는 일본 백화점 그룹인 도큐회사가 만들었는데 회원권 거래도 안되고 일본의
실력자만이 회원이 될 수 있다.
식당도 정장을 입어야만 입장이 가능하고 라커룸에 회원의 사진이 걸려 있을 정도로 철저한 프라이빗
골프장이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가 재임시 회원가입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일화가 유명하다.
안양CC(현 안양베네스트GC)는 바로 이 골프장을 모델로 삼아 만들어졌다.
이 회장은 도쿄 인근의 이곳에서 일본 고위층과 라운드하면서 친선을 도모하고 사업정보도 얻곤 했다.
이 회장은 이 사람들과 사교하면서 얻어낸 사업아이템이 큰 도움이 됐다고 자주 말했다.
이 회장은 한 걸음 나아가 주일 한국대사들을 일본 거물들과 연결시켜 줘 한국이 기술도입이나 차관을
얻는데 상당한 도움을 받도록 했다.
골프를 통해 ‘민간 외교관’ 역할을 한 셈이다.
일본인들은 이 회장을 접하면서 경외감을 같은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들은 이 회장을 두고 동방예의지국에서 가장 지혜롭고 예리하고 예의바른 멋진 신사라고 평했다.
이 회장은 일본 사람들과 골프를 하면서 그 사람이 스윙이나 스코어가 안좋으면 자상하게 가르치면서
라운드를 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맞는 골프채를 사 선물하기도 하고 레슨프로를 붙여주기까지 했다.
이러니 일본인들이 이 회장편이 안될 수 없었다.
이 회장은 골프장에 오면 마음이 편해져 사교하기 쉽고 여러 정보를 얻기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고 이병철 삼성회장은 일주일에 세 번 안양골프장을 찾았다. 수·금·일요일로 이틀에 한 번 꼴로
라운드를 했다.
이 회장의 티오프 시각은 고정돼 있었다.
수요일과 금요일엔 낮 12시30분, 일요일에 오전 10시에 정확히 티오프했다.
이 회장의 모임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수요회’다.
수요회란 수요일에 모여 라운드를 하는 모임이라는데서 유래했다.
회원은 20명 안팎이었다.
이 회장을 포함, 신현확 국무총리, 민복기 대법원장, 유창순 국무총리, 안희경 변호사, 김진만
국회부의장, 신용호 교보회장, 권철현 연합철강 회장, 박태원 경기도지사 등 당시 내로라하는
인사들로 구성됐다.
이 회장은 김진만 부의장, 신현확 총리, 권철현 회장, 박태원 지사와 같은 조로 플레이했다.
그런데 이 회장은 플레이할 때 반드시 내기를 즐겼다.
그것도 타당 1천원짜리 내기였다.
액수는 적지만 내기골프를 즐긴 것은 ‘골프를 적당히 하는 것을 배제하고 플레이의 묘미를
돋우기 위해서’였다.
이 회장의 이런 성격을 잘 아는지라 직원들은 미리 3만∼5만원을 천원짜리로 바꿔서 플레이
시작전 드리곤 했다.
물론 수요회 멤버들은 라운드 후 스코어카드를 보고 정산을 했다.
이 회장은 비록 천원짜리 내기 였지만 동반자들보다 잘 쳐 ‘따는 날’은 좋아하고 기뻐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대한민국 제일가는 갑부였지만 내기에서 단 몇 푼을 땄다고 하여 기뻐하는 모습은
‘사람의 심정은 갑부나 범부나 똑같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이 회장을 지도했던 한장상
프로는 회고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이 회장과 같은 조로 플레이한 모기업 회장이 스코어가 좋지 않아 1만∼2만원을 잃은 듯 했다.
라운드 후 이 회장이 “돈을 잃게 될 것 같은데 마음이 상합니까”라고 묻자 그 회장은 대뜸 “돈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회장이 다시 “재산이 몇백억원 이라는데 뭘 그럽니까”라고 말하니 그 회장 왈 “아닙니다.
몇백억이 아니라 180억원 있습니다”라고 말해 좌중이 폭소를 터뜨렸다.
여하튼 이 회장과 수요회 멤버들은 작은 내기를 통해 모임의 끈을 단단히 조였다고 전해진다.
이 회장 골프의 특징은 무리를 하지 않는 것이다. 홀을 공략할 때 과욕을 부리는 일이 없었다.
또 골프 규칙을 철저히 준수했는데 그것은 이 회장이 예약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것과 더불어
이 회장의 ‘완벽주의’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회장은 수요회외에는 여타 골프모임에 관여하지 않았다.
아무리 높은 데서 부킹청탁이 들어와도 “내 소관이 아니다. 담당자에게 말해보라”며 거절했다.
그러니 골프장 직원들은 감히 부킹청탁을 받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다른 골프장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 이병철 삼성 회장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 본격적으로 가까워진 것은 안양골프장(현 안양베네스트GC)에서 라운드를 함께 하고 난 뒤였다.
1967년 안양골프장을 오픈하고 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이 회장이 지인들과 골프를 치고
있었다. 그날 누군가가 찾아왔다.
전갈을 들은 이 회장은 바로 골프를 중단하고 클럽하우스로 내려갔다.
알고보니 박 대통령이 찾아온 것이었다.
이 회장과 박 대통령이 함께 라운드를 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 회장과 박 대통령은 9홀을 돌고 나서 저녁식사 자리로 이어졌다.
그 자리에 참석한 신용남씨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사업하는 사람들이 사업에만 매달리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나무관리도 잘 하는 줄 몰랐다. 사업가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회장은 안양골프장을 조성하면서 나무들을 전국 각지에서 귀한 나무만 골라서 심었다.
오죽하면 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이 우정힐스골프장을 만들면서 “지금은 어디에서도 안양골프장
같은 나무를 구할 수가 없다”고 안타까워했을 정도였다.
박 대통령은 그날 농촌을 살리고 싶은데 사업가들이 동조를 해줬으면 좋겠다며 이 회장의 협조를
구했다.
이 회장은 이후 박 대통령을 돕기 위해 지금의 용인자연농원이 된 땅을 사들이기 시작, 그곳에 양돈,
과실 시범단지를 조성했다.
박 대통령은 그 후에도 자주 안양골프장을 찾아와 이 회장과 교분을 나눴다.
이 회장은 김종필 현 자민련 명예회장과도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다. 김종필씨는 이 회장으로부터
국가경영에 관한 여러가지 조언을 들었다고 한다.
최근에 김종필씨는 “골프와 관련해선 이 회장이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이라며 이 회장에 대한 일화
한토막을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다.
“골프광이었던 이 회장은 하늘에 가서도 골프장을 만들었을텐데 아마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 박종규
경호실장 두 명은 멤버십에서 빼버렸을거야. 두 사람한테 많이 시달렸거든. 특히 김형욱은 내기골프를 쳤을 때 자기가 이기면 진 사람한테 다음날이라도 사람을 보내 돈을 받아냈지. 그런데 만약 질 것 같으면 ‘때맞춰’ 걸려온 부하들의 전화를 받고 ‘각하가 부른다’는 핑계를 대면서 중간에 도망쳤지”
이 회장은 평소 자기 뜻대로 안되는 세가지를 꼽곤 했다.
조미료 사업에서 미풍이 미원을 이기지 못하는 것과, 자식농사, 그리고 골프가 그것이었다.
고 이병철 삼성회장의 골프에 대한 애정은 나이가 들어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한겨울 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도 ‘설경이 좋다’며 라운드를 하곤 했다.
그러면 직원들이 총동원돼 눈을 치우고 보조 캐디가 여러명 붙었다.
날씨가 추워도 라운드 중간에 그만두는 경우는 없었다. 꼭 18홀을 다 돌았다.
1976년 9월 일본에서 위암수술을 받고 온 뒤에도 골프장에 가끔 들렀다.
골프는 못하더라도 수요회에 참가해 차를 마시면서 예전의 그 분위기를 즐기는 것이었다.
이 회장이 가을이 와 잔디가 누렇게 되면 몹시 안타까워했다.
이를 본 큰 딸 이인희씨는 ‘일본에서 이렇게 하는 것을 봤다’며 그린에 파란물감을 칠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라도 올라치면 물감이 번져 보기가 흉했다.
이러다보니 나중에는 그린을 비닐로 덮어 두었다가 이 회장이 나오는 수요일과 일요일에 벗겨 푸르름을 유지하곤 했다.
1987년 이 회장이 작고하기 며칠전인 10월 27일경.
이 회장은 골프카트를 타고 라이트를 켠 채 생애 마지막을 라운드를 했다.
그 날은 낮부터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이 회장은 그 때 부축을 해줘야 2층에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이 회장은 그날 오후 4시30분께 갑자기 “골프화를 가져오라”고 했다.
날이 흐려 어두컴컴해지려는 시간이었기에 직원들은 ‘뜻밖이다’고 생각하면서도 지시를 따랐다. 당시에는 한장상 프로가 그만두고 이강선 프로가 안양골프장에서 근무했다.
이 프로는 골프화와 볼, 골프클럽, 골프카트를 준비해갔다.
이 회장이 1번홀 티잉그라운드에 올라섰다. 이 프로가 “한 번 쳐보시겠습니까?”라고 묻자 이 회장은 “응, 가져와 보게”라고 말했다.
볼이 잘 맞을리 없었다.
첫 번째 티샷은 헛스윙이나 다름없었고 두 번째 시도한 샷도 약 10m 전진하는데 그쳤다.
그러자 이 회장은 이 프로에게 “이군도 치라”고 했다.
이 프로가 샷을 날리자 “가자”며 앞으로 나갔다.
세컨드샷 지점에 가니 이 회장은 “내 볼이 어디 있는가”라고 물었고 이 프로가 볼을 찾아주자 그 때부터 평상시 라운드와 똑같이 플레이를 진행했다고 한다.
3번홀에 다다라 날이 컴컴해지자 이 프로가 “들어가시죠?”라고 했고 이 회장은 “응, 들어가지”라고 대꾸했다.
이 회장은 그러나 4번홀이 파3홀이기 때문에 그 홀을 마저 마치고 5번홀 대신 클럽하우스로 향하는 8, 9번홀로 이동하려는 요량이었던 것 같았다.
4번홀 티샷을 할 때부터는 불을 켜야 플레이를 할 수 있었다.
골프장에 있던 골프카트 4대, 오토바이 3대, 이 회장차에 달려있는 헤드라이트를 모두 밝혀 이 회장이 샷을 하는 곳을 비쳤다.
그 상태로 8, 9번홀을 마쳤다.
불을 켜고 라운드한 것은 그 세 홀이 전부였다.
이 회장은 그래도 아쉬웠던지 10번홀을 한 번 둘러보고 클럽하우스로 향했다.
당시 현관 앞에는 모형 그린이 있었는데 이 회장은 카트를 탄 채 그 그린을 세바퀴 돌았다. 그 뒤로 이 회장은 안양골프장에 나타나지 않았고 20일 후 타계했다.
불을 켜고 한 라운드가 이 회장의 ‘마지막 라운드’였다.
이 회장은 이미 자신의 운명을 예견한 듯 그토록 사랑했던 골프장을 찾아 생애 마지막 라운드를 마쳤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