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교전 · 적 탱크에 바주카포를 발사하다
젖먹이 아이를 싸안은 채 머리에는 가재도구를 이고 황망히 피란길에 오른 한국 아낙네. [출처: War In Korea] |
이틀 후 종군기자들은 지프로 미군 최초의 전투지역을 시찰하기 위해 새벽에
대전을 출발했다. 장마는 계속돼 억수 같은 비가 쏟아졌다. 평택 인근에 다다랐을 때, 도로 옆에는 폭격을 당해 수족이 절단된 수십 명의 불운한 피란민 시체가
널려 있었다. 도로 양쪽의 개천과 논에서는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우리의 대화는 날씨만큼이나 침울했고, 대화의 주제가 묘비명으로 옮겨졌다. 매카트니 로이터통신 도쿄 지국장은 버마에 있는 영국군 무명용사 묘비명을 통째로 암송
했다.
“여기, 우리가 죽어서 누워 있다오. 우리를 낳아준 조국을 위해 부끄럽게 살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이라오. 사람들은 생명을 잃을 만큼 가치 있는 것은 많지 않다고들 하지요. 그러나 젊은이들은 생명을 걸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오. 그리고 우리는 젊었다오.”
이날 아침은 우리 모두가 대체로 우울했으나, 나는 순전히 개인적인 일 때문에도 침울했다. 나의 소속사인 뉴욕 헤럴드 트리뷴이 새로 파견한 내 선배 동료가
같은 신문에서 2명씩이나 한국에 체류할 필요가 없다면서 나더러 한국을 떠나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도쿄로 돌아가지 않으면 해고될 것이라고 엄포를 놓기도 하고, 심지어 내가 도쿄에 독신자 친구(맥아더 장군을 의미)를 갖고 있다는 소문이 있지만, 자기는 그런 소문을 믿지 않는다는 식으로 회유하기까지 했다.
6·25전쟁을 취재하는 유일한 여자 기자이기 때문에 나는 많은 화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미군과 다른 기자들의 도움으로 여름이 다 지날 즈음, 내 신상에 관한 문제는 잔류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평택의 대대 전투지휘소에 도착해 커피 한 잔을 즐기려 했을 때 바쓰 준장이 오두막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지휘관들에게 말했다.
“적의 탱크가 남쪽을 향하고 있다. 바주카포 팀을 긴급 지원하라.”
우리가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이자 그는 몇 마디를 덧붙였다. “공산군의 탱크가 미국인들과 처음으로 조우하게 될 것입니다. 스미스 중령이 이끄는 특수임무부대가 방어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 포병 중대의 공격을 용케 피해 나오는 적의 탱크들이 있다면, 그들은 곧장 이곳으로 진군해 올 것입니다.”
바로 몇 시간 전에 전선에 도착한 미국의 젊고 미숙한 병사들은 이렇게 전투에
돌입하게 됐다. 바주카포 팀을 따라 미지의 전선으로 향하는 동안 나는 불안감과 흥분이 교차되는 매우 불유쾌한 감정을 경험했다. 비에 흠뻑 젖은 담요로 몸을
감싼 채 우리는 신속히 이동했다. 도로는 한국 군인들로 꽉 막혀 있었다.
헬멧을 나뭇가지로 빗각으로 튀어나오게 위장한 한국군 병사 한 명이 말을 타고 우리에게 다가오면서 외쳤다.
“탱크! 탱크! 탱크들이 몰려와요! 돌아가시오!”
얼마나 많은 탱크들이 우리와 스미스 중령 휘하의 부대 사이에 위치한 이 조그마한 마을에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이날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인 찰스 페인 중위를 만났다. 그에게 다시 전쟁터에 복귀하게 된 소감을 물었다. “글쎄요, 일본에서 이곳으로 오게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솔직히 죽을까봐 겁이 났습니다. 내가 누릴 좋은 운을 이탈리아에서 다 써버렸다고 생각했거든요.
인간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는 단지 몇 번의 기회가 있는 겁니다. 그러나
총소리를 듣자마자 이런 감정을 극복했습니다.”
그러나 페인 중위가 자신의 행운의 몫이 앞으로 얼마나 위태롭게 될는지를 미리 알았었다면, 크게 겁먹었을 것이다. 내가 8월에 다시 그를 보았을 때 대대본부의 11명 간부 중에서 대대장 아이레스 중령과 페인 중위만이 생존해 있었다.
900명의 대대원 중에서 263명만이 온전히 살아남았고, 나머지는 사망했거나
부상당했다.
우리가 6·25전쟁 최초의 미국인 죽음을 목격한 것은 바로 이곳이었다.
아군 박격포팀 소속 50여 명의 젊은이는 최초의 공격명령을 받았을 때 마치 단편 뉴스영화를 관람하는 것처럼 적의 탱크들을 응시했다. 그리고 바주카포를 발사했다. 공산군 탱크들은 포탑을 들어 화염을 뿜어 답례했다. 적군 병사들은 탱크에서 뛰어내려 기관총으로 미군 바주카포팀을 향해 공격하기 시작했다.
나는 쌍안경을 통해 금발의 미군 병사가 목표를 조준하려고 풀밭에서 머리를
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때 적의 탱크에서 섬광들이 지표에 거의 닿듯이 튀어나오면서 그가 쓰러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날이 어두워 확인할 수는 없었다.
몇 분 후 어느 병사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섀드릭이 가슴에 총을 맞았어요. 사망한 것 같습니다.”
병사의 말투는 극히 사무적이었다. 나는 그때 전쟁의 실상은 문학작품에서
비쳐지는 그 어떤 묘사보다도 훨씬 더 사무적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부상자들도 거의 우는 법이 없었다. 누구도 그들의 울음을 들어줄 시간도 없고, 마음의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첫 번째 교전에서 완전히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대대의 전면 후퇴가
불가피하게 됐다. 적의 탱크들을 저지할 수단을 갖지 못했고, 측면으로 공격해
오는 적의 보병을 막기에 병력이 너무도 모자랐다. 우리는 스미스 전진부대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하기조차 싫었다. 사람들은 전투에 임하게 되면 평소와는 전혀 다른 감정으로 사태를 대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나도 이 같은 현상을 꽤나 쉽게 경험했다.
본부에 도착해서 내가 한 첫 행동은 몸을 건조시키는 일이었다. 다음으로
의무부대에 가서 이후 나의 가장 귀중한 개인 소지품이 될 살충제를 구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때 섀드릭 이등병의 시신이 운반돼 왔다. 그의 얼굴은 덮여 있지 않았다. 시신이 낡은 판자 위에 눕혀질 때, 그의 얼굴에서 약간 놀란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 이후 나는 죽은 병사에게서 그런 표정을 자주 보았다.
섀드릭 이등병은 자기에게 죽음이 찾아올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보였다. 마치 그때 내게는 6·25전쟁이 전면전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없어 보였던 것처럼. 그는 참으로 어렸다. 19세 나이라지만 금발머리와 연약한 체격을 가졌기에 훨씬 어려 보였다. 누군가 그에게 덮을 마른 담요를 찾으러 나갔다. 의무부대
병장이 분말 벼룩약을 내게 건네주면서 시신을 힐끗 쳐다보고는 말했다.
“안타깝게도 이곳에서 죽다니.”
다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