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봄 나들이
지난 16일(월)에 포항을 다녀왔습니다. 아마도 42년 만인가 싶습니다.
44년 전인 1965년 1월, 신병 훈련소 훈련을 마치고 배치된 곳이 이곳 포항,
“해병 제1사단 제2연대 제2대대 제6중대 제3소대 제2분대”의 소총수로
요즈음 말하는 해병대 “막장”, 보병 소총소대였습니다. 다행히(?) 간첩이
출몰하고 북괴군과 대치하고 있던 전방 서부 전선 김포 강화는 아니고
포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2연대는 파월 참전 전투부대로 지명되어 최초의
전투부대로 월남 전쟁에 참가하는 영광(?)을 안겨 주었습니다.
1966년11얼 18일 월남에서 귀국하고 1967년 2월 28일 전역하면서 포항을
떠났습니다. 귀국 후 전역 때까지 배치 받았던 부대는 3개월을 지내면서
상륙 훈련까지 했는데도 소속이 어느 부대였는지 그렇게 기억력이 좋다는
나도 새까맣게 잊어버려 전혀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 포항, 해병 제1 상륙 사단으로 “아! 청룡이여!” 책자 100권을 전달하러
갔습니다. “모군 방문”이란 이름으로 새벽 6시에 서울을 떠나 11시 반에
도착하여 “역사 박물관” 돌아보고, 책자 전달하고, 최신식 병영을 돌아본 뒤
병사들과 함께 점심 식사하고 그리고 해안의 전차대대로 가서 LVT (Landing
Vehicle, Tracked)라고 하는 상륙정을 타고 바다를 한 바퀴 돈 다음에
방문 일정은 모두 마치고 영일만의 꼬리 “호미(虎尾)곶”에 들러 회 한 접시
맛보고는 서울로 올라 왔습니다.
해돋이 호미곶, 호미곶 해서 어딘가 했더니 우리가 알고 있던 경북 영일만의
소위 “토끼 꼬리” 장기곶, 또는 장기岬(갑)을 “호랑이 꼬리”라고 이름을
바꿨더군요. 일본이 우리를 비하하여 한반도를 토끼라고 한 것에 반발하여
토끼가 아니고 호랑이라고, 그래서 토끼 꼬리가 아니고 호랑이 꼬리라고요.
워낙은 사단장이 직접 나와 책을 증정 받고 군악대와 의장대 시범도 불 줄
기대했는데 우리 위상이 거기까지 미치지는 못했나 봅니다. 더구나 우리를
밀착 취재하겠다던 국군의 방송 TV의 백년전우 프로그램도 이유도 모른 채
취소되어 그 때문인가 싶기도 하지만 하기는 우리까지 군악대와 의장대를
괴롭힌다면 현역들도 좀 짜증이 나겠습니까?
역사 박물관에 가서 드디어 내가 월남에서 귀국할 때 들고 왔던 그 청룡
2대대 오윤진 대대장의 “흔들이 의자”와 43년 만에 감격의 재회를 했습니다.
“이제 앉아 볼 수는 없어도 옛 전우를 만난 듯 그 옆에 서서 사진이라도…..”
한 번 찍고 싶다던 소원을 드디어 이루었습니다.
또한 이번 방문에서는 젊은 군인들은 우리 월남전 참전 전우들을
홀대(?) 했는지 몰라도 그 동안 흩어져 소식도 몰랐던 전우들과 감격의
재회를 한 일은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한 일이었습니다.
구미 해병 전우회의 이정출 전우는 나와 같은 158기의 훈련소 동기로 청룡
1진 중에서도 포병대대 수송병으로 장비와 함께 1965년 9월28일 선발대로 출발,
월남에 도착했고 귀국직전 급수차 운전 중 지뢰 폭발로 중상을 당한 전우입니다.
70년대, 80년대까지는 우리나라가 너무 가난해서 대접을 못 받았고
90년대에는 나라가 너무 무식해서 우리 월남 참전 용사들이 대접을 못 받았는데
지난 10년 동안은 좌파 정권에 의해 오히려 핍박을 당하는 지경이 되었지만
우리는 드디어 청룡부대 역사를 재조명한 “아, 청룡이여!”를 기어이 발간해
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모군 방문에 참가한 159기의 김형두 전우는 나와 같이 청룡
제1진으로 같은 수송선에 탔고, 같은 날 월남 캄란 만에 상륙했고, 시련의 땅
투이호아 전투를 거쳐서 응전의 땅 추라이까지 이동한 뒤, 귀국도 제6제대로
다낭 항에서 같은 수송선으로 함께 귀국한 전우입니다. “아, 청룡이여!”를
출간하기까지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던 청룡 1진 전우들을 이번 모군 방문에서
우리는 그렇게 다시 만났습니다. 만나서 나눈 회포가 남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강산이 네 번이 더 변한 세월이 지나고 가 본 병영은 우리가 근무했던 병영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씨멘트 블록으로 쌓고 그 안에 나무 침상을 상하로 얹어
지었던 그래도 그 시절에는 괜찮은 병영이었는데 지금은 철근 콘크리트 연와조의
깨끗한 3층 건물에 대학 기숙사보다도 더 좋아 보이는 내무반 침상이며 헬스 클럽
수준의 체력 단련실에 한 달 식단이 짜여져 있고 각자가 자기 먹을 만큼 음식을
담아 먹는, 곰국이 곁들여진 식사며, 국제 대회도 치를 만한 실내 수영장까지
영내에 갖춘 병영이었습니다. 이전에 미8군 병영에 들어가 본 느낌과 꼭 같다고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그 때 미8군 병영은 우리에게 꿈과 같은 곳이었지요.
우리는 그 꿈을 이루어 우리 후배들에게 주었습니다.
옛날 상륙정은 LVT(Landing Vehicle, Tracked)라고 했나요?
지금은 KAAV(Korean Amphibious Assaulting Vehicle)이라고 한답니다.
미국 AV를 그대로 복사해 국산 제작한다고 합니다. 2차 대전 때 썼던
버릴 데가 없는 무기를 무상원조로 얻어 쓰던 세월과는 또한 달라졌습니다.
자주 국방이란 우리의 독자적인 정보체계와 무기체계를 갖출 때가
자주 국방입니다. 연합사만 해체한다고 자주국방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 정보 체제를 까발려 무너뜨리는 것이 자주 국방입니까? 독자적인
정보체계도 없이 독자적인 무기체계도 없이 전시작전권만 대통령이 넘겨
받아 쥐고 있으면 적이 대통령 인상 보고 벌벌 떱니까? 국가 전략 기동군,
해병대를 키우고, 사기를 높이고, 전력을 강화해야 적이 못 쳐들어 옵니다.
미국처럼 해병대가 청와대를 비롯한 모든 해외공관을 경비하고 현역 해병대
대장이 서너 명은 있어서 사령관에, 연합사 사령관도 하고, 합참의장도 하고
그 뒤에 국방부 장관도 하고 해야 세계 최강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의 어느
적군도 우리를 함부로 못하게 되는 겁니다. 꿈입니까? 꿈꾸는 자 만이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꿈도 이루어 후배 해병들에게 물려줍시다.
42년 만에 모군을 방문하면서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함께 동행해 주신 전우들, 이 글을 빌어 모든 분에게 감사 드립니다.
사랑합니다! 해병대!! 필씅!!!
지난 16일(월)에 포항을 다녀왔습니다. 아마도 42년 만인가 싶습니다.
44년 전인 1965년 1월, 신병 훈련소 훈련을 마치고 배치된 곳이 이곳 포항,
“해병 제1사단 제2연대 제2대대 제6중대 제3소대 제2분대”의 소총수로
요즈음 말하는 해병대 “막장”, 보병 소총소대였습니다. 다행히(?) 간첩이
출몰하고 북괴군과 대치하고 있던 전방 서부 전선 김포 강화는 아니고
포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2연대는 파월 참전 전투부대로 지명되어 최초의
전투부대로 월남 전쟁에 참가하는 영광(?)을 안겨 주었습니다.
1966년11얼 18일 월남에서 귀국하고 1967년 2월 28일 전역하면서 포항을
떠났습니다. 귀국 후 전역 때까지 배치 받았던 부대는 3개월을 지내면서
상륙 훈련까지 했는데도 소속이 어느 부대였는지 그렇게 기억력이 좋다는
나도 새까맣게 잊어버려 전혀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 포항, 해병 제1 상륙 사단으로 “아! 청룡이여!” 책자 100권을 전달하러
갔습니다. “모군 방문”이란 이름으로 새벽 6시에 서울을 떠나 11시 반에
도착하여 “역사 박물관” 돌아보고, 책자 전달하고, 최신식 병영을 돌아본 뒤
병사들과 함께 점심 식사하고 그리고 해안의 전차대대로 가서 LVT (Landing
Vehicle, Tracked)라고 하는 상륙정을 타고 바다를 한 바퀴 돈 다음에
방문 일정은 모두 마치고 영일만의 꼬리 “호미(虎尾)곶”에 들러 회 한 접시
맛보고는 서울로 올라 왔습니다.
해돋이 호미곶, 호미곶 해서 어딘가 했더니 우리가 알고 있던 경북 영일만의
소위 “토끼 꼬리” 장기곶, 또는 장기岬(갑)을 “호랑이 꼬리”라고 이름을
바꿨더군요. 일본이 우리를 비하하여 한반도를 토끼라고 한 것에 반발하여
토끼가 아니고 호랑이라고, 그래서 토끼 꼬리가 아니고 호랑이 꼬리라고요.
워낙은 사단장이 직접 나와 책을 증정 받고 군악대와 의장대 시범도 불 줄
기대했는데 우리 위상이 거기까지 미치지는 못했나 봅니다. 더구나 우리를
밀착 취재하겠다던 국군의 방송 TV의 백년전우 프로그램도 이유도 모른 채
취소되어 그 때문인가 싶기도 하지만 하기는 우리까지 군악대와 의장대를
괴롭힌다면 현역들도 좀 짜증이 나겠습니까?
역사 박물관에 가서 드디어 내가 월남에서 귀국할 때 들고 왔던 그 청룡
2대대 오윤진 대대장의 “흔들이 의자”와 43년 만에 감격의 재회를 했습니다.
“이제 앉아 볼 수는 없어도 옛 전우를 만난 듯 그 옆에 서서 사진이라도…..”
한 번 찍고 싶다던 소원을 드디어 이루었습니다.
또한 이번 방문에서는 젊은 군인들은 우리 월남전 참전 전우들을
홀대(?) 했는지 몰라도 그 동안 흩어져 소식도 몰랐던 전우들과 감격의
재회를 한 일은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한 일이었습니다.
구미 해병 전우회의 이정출 전우는 나와 같은 158기의 훈련소 동기로 청룡
1진 중에서도 포병대대 수송병으로 장비와 함께 1965년 9월28일 선발대로 출발,
월남에 도착했고 귀국직전 급수차 운전 중 지뢰 폭발로 중상을 당한 전우입니다.
70년대, 80년대까지는 우리나라가 너무 가난해서 대접을 못 받았고
90년대에는 나라가 너무 무식해서 우리 월남 참전 용사들이 대접을 못 받았는데
지난 10년 동안은 좌파 정권에 의해 오히려 핍박을 당하는 지경이 되었지만
우리는 드디어 청룡부대 역사를 재조명한 “아, 청룡이여!”를 기어이 발간해
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모군 방문에 참가한 159기의 김형두 전우는 나와 같이 청룡
제1진으로 같은 수송선에 탔고, 같은 날 월남 캄란 만에 상륙했고, 시련의 땅
투이호아 전투를 거쳐서 응전의 땅 추라이까지 이동한 뒤, 귀국도 제6제대로
다낭 항에서 같은 수송선으로 함께 귀국한 전우입니다. “아, 청룡이여!”를
출간하기까지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던 청룡 1진 전우들을 이번 모군 방문에서
우리는 그렇게 다시 만났습니다. 만나서 나눈 회포가 남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강산이 네 번이 더 변한 세월이 지나고 가 본 병영은 우리가 근무했던 병영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씨멘트 블록으로 쌓고 그 안에 나무 침상을 상하로 얹어
지었던 그래도 그 시절에는 괜찮은 병영이었는데 지금은 철근 콘크리트 연와조의
깨끗한 3층 건물에 대학 기숙사보다도 더 좋아 보이는 내무반 침상이며 헬스 클럽
수준의 체력 단련실에 한 달 식단이 짜여져 있고 각자가 자기 먹을 만큼 음식을
담아 먹는, 곰국이 곁들여진 식사며, 국제 대회도 치를 만한 실내 수영장까지
영내에 갖춘 병영이었습니다. 이전에 미8군 병영에 들어가 본 느낌과 꼭 같다고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그 때 미8군 병영은 우리에게 꿈과 같은 곳이었지요.
우리는 그 꿈을 이루어 우리 후배들에게 주었습니다.
옛날 상륙정은 LVT(Landing Vehicle, Tracked)라고 했나요?
지금은 KAAV(Korean Amphibious Assaulting Vehicle)이라고 한답니다.
미국 AV를 그대로 복사해 국산 제작한다고 합니다. 2차 대전 때 썼던
버릴 데가 없는 무기를 무상원조로 얻어 쓰던 세월과는 또한 달라졌습니다.
자주 국방이란 우리의 독자적인 정보체계와 무기체계를 갖출 때가
자주 국방입니다. 연합사만 해체한다고 자주국방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 정보 체제를 까발려 무너뜨리는 것이 자주 국방입니까? 독자적인
정보체계도 없이 독자적인 무기체계도 없이 전시작전권만 대통령이 넘겨
받아 쥐고 있으면 적이 대통령 인상 보고 벌벌 떱니까? 국가 전략 기동군,
해병대를 키우고, 사기를 높이고, 전력을 강화해야 적이 못 쳐들어 옵니다.
미국처럼 해병대가 청와대를 비롯한 모든 해외공관을 경비하고 현역 해병대
대장이 서너 명은 있어서 사령관에, 연합사 사령관도 하고, 합참의장도 하고
그 뒤에 국방부 장관도 하고 해야 세계 최강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의 어느
적군도 우리를 함부로 못하게 되는 겁니다. 꿈입니까? 꿈꾸는 자 만이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꿈도 이루어 후배 해병들에게 물려줍시다.
42년 만에 모군을 방문하면서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함께 동행해 주신 전우들, 이 글을 빌어 모든 분에게 감사 드립니다.
사랑합니다! 해병대!! 필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