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출신 기대 저버리고 중국과 휴전 택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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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포병지원사격을 관측하고 있는 미 해병1사단 참모들 / (中)6·25전쟁 중 부상당한 미군 병사들. / (下)6·25전선을 찾은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 당선자. | 본능적으로 미국 국민들은 가장 치명적인 파괴무기, 즉 핵무기에 대해서 극도의 혐오감을 갖고 있다.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도 핵무기를 혐오하기는 마찬가지이며, 이는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나는 한반도에서 이런 끔찍한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차선책을 택하는 것이 인간에게 어떠한 고통을 주는지를 목격했다.
내가 그 장면을 경험한 것은 1952년 8월 미 해병대가 중공군과 벙커힐 전투(Korea's Battle of Bunker Hill)를 치르는 과정에서 사상자들이 너무 많아 해병 증원 병력을 항공으로 투입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이 체험담을 얘기하기 전에 언급해 둘 것이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6·25전쟁이 교착상태일 때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는지 잊고 있다. 그렇게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이유는 중공군이 아주 잘 준비된 진지들에서 공격을 시작하는 이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전이 서명되기 바로 1개월 전인 1953년 6월에만 유엔군 측은 1만8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같은 사상자 수는 중공군이 최초로 개입함으로써 우리가 북한지역으로부터 철수했을 때의 사상자 수보다 많은 수치다.
이야기를 다시 목격담으로 돌려보자. 나를 태운 지프가 벙커힐 고지의 관측소로 향하는 길로 들어서기 위해서 커브를 도는데, 해병대 대령이 포탄으로 파괴된 길가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는 양팔로 극악무도한 공산군의 지뢰를 밟은 병사를 껴안고 있었다.
그 끔찍한 광경은 차마 눈 뜨고 못 볼 지경이었다. 부상병의 두 다리는 무릎 아래가 날아갔다. 뾰쪽뾰쪽한 금속들이 그의 얼굴·머리·팔·몸통을 뚫고 들어갔다. 그의 몸은 온통 피투성이었고, 그의 몸에 도대체 성한 부분이 어디인지 보이지가 않았다.
부상병이 죽고 그의 몸에 판초가 씌워지자, 대령은 나를 보며 눈물을 보이며 쓴소리를 쏟아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의 절규는 다음과 같다.
“당신은 마침 미국에서 돌아오는 길이군요. 제게 제발 말씀 좀 해주세요. 미국인들은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싸우기를 기대하는 것입니까? 저기 산등성이가 보이지요? 그 뒤에 중공군들이 진지를 구축하고 포상(砲床)을 설치해 놓았습니다. 적의 포탄들 때문에 우리는 이곳 지옥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적을 몇 개의 전술 핵무기로 쓸어버릴 수 있습니다. 나는 압니다. 전술 핵무기 사용에 대한 교육을 받기 위해 특수학교에 다녔거든요. 사용하지 않을 무기를 만들기 위해서 도대체 왜 돈을 허비합니까? 흔히 우리는 인간적이어야 한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그런데 대체 누구에게 인간적이 되라는 것입니까? 우리 해병대 제1사단은 벙커힐 고지를 고수하기 위해 지난밤에 1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물론 오늘 밤에도 1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또다시 나올 것입니다. 만일 전쟁이 인간에게 죽음을 요구할 정도로 중요하다면, 마땅히 그들에게 최선을 다해서 싸울 기회를 충분히 줘야 합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싸운다는 것은 최선의 무기들을 갖고 무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3자로부터 압력을 받은 일부 정치인들이 장병들의 생명을 구해 줄 ! 수 있는 무기들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결정함으로써 수많은 장병이 불필요하게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고지를 점령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우리 지휘관들이 어떤 느낌을 가질 것으로 생각합니까? 이곳에서 빌(지뢰를 밟아 사망한 해병 이름)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생생하게 지켜본 당신은 내게 어떤 무기가 다른 무기보다 더 끔찍하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 빌어먹을 지뢰는 핵폭탄만큼이나 치명적으로 당신을 살해합니다. 단지 죽는 데 걸리는 시간만이 일반적으로 오래 걸릴 뿐입니다.”
이 말을 하는 동안 해병대령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1952년 12월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1890~1969) 대통령 당선자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중공군에 대한 대응공격이 곧 이뤄질 것이라는 단편적인 소문들이 나돌았다. 밴 플리트 미8군사령관도 줄곧 얘기했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군인입니다. 그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내가 아이젠하워와 마지막으로 인터뷰한 것은 그가 1952년 대통령에 출마하기 바로 전, 초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총사령관으로 재직하던 때다. 당시 나는 그와 국제문제에 대해 장시간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소문대로였다. 어린애같이 천진난만한 그의 웃음 뒤에서 나는 철과 같이 단단한 모습을 보았으며, 그는 인터뷰 내내 긴장감과 때로는 엄격함, 그리고 학자와 같은 인상을 풍겼다. 혹자는 그에게서 지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없다고 하지만, 내가 본 그는 기말시험을 앞두고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과 같이 책에 심취한 인물이었다.
그는 내게 에릭 호퍼(Eric Hoffer, 1902~1983, 뜨내기 노동자 생활을 하며 독자적인 철학세계를 구현한 인물)가 집필한 ‘The True Believer’(국내에 ‘대중운동론’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본이 나왔음)를 선물했다. 그는 단순히 그 책을 선물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부분의 여백에 직접 주석을 달아놓고 친필 서명까지 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특히 잊지 못하는 것이 있다. 에릭 호퍼의 책 중에 나오는 “모든 형태의 봉헌, 헌신, 충성, 자기굴복은 본질적으로 우리의 헛되고 퇴락한 삶에 가치와 의미를 주는 무엇인가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것이다” 구절에 달아놓은 아이젠하워의 주석이다. 그는 호퍼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면서 파란색 잉크로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았다.
“이는 명백한 오류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국가에 헌신한다는 것은 집단의 과업들이 너무 중요해 우리 개개인이 그 과업들을 헌신적으로 떠맡아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경험을 했던 나는 밴 플리트 장군과 같이 아이젠하워가 필요한 조치를 취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아이젠하워가 중공군에 대한 반격을 하기에는 시기가 너무 늦었다고들 얘기했다. 그래서 나는 대통령 당선자로 방한하는 아이젠하워를 직접 만나 물어보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아이젠하워의 오랜 친구이자 대통령 선거에서 그를 위해 적극적인 선거운동을 했던 인사를 만났다. 그는 내게 아이젠하워가 민간인 대통령이 아니라 군인 출신의 대통령이므로 군사조치 명령을 내리는 것이 심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더 힘들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귀띔해 줬다.
“내가 아이젠하워에 대해서 우려하는 단 하나가 있습니다. 그는 ‘군사적 마인드’를 가졌다고 일컬어지는 것에 대해 매우 민감해 반대방향으로 너무 기울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즉, 군국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는 취약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너무 오래 결정적인 조치를 취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민간인 출신이라면 두려움 없이 적시에 강력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역주: 결국 히긴스와 밴 플리트 장군의 기대는 어긋났다. 아이젠하워는 그의 친구 말대로 중공군에 대한 대규모 반격을 지시하지 않고 휴전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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