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선 지휘관 “어떻게 싸우란 말인가” 불만 고조


(上)북한 나진 항구 폭격. / (中)6브래들리(왼쪽 둘째) 미 합참의장 방한. (1951년). / (下)장진호 서쪽 유담리에서 영하 25도의 혹한 속에 최초의 철수를 시작하는 미 해병대.


미국은 6·25전쟁 기간 중에 기본 방침들을 변경함으로써 동양인은 물론, 책임 있는 지위에 있는 미국인·영국인·프랑스인들도 혼란스럽게 했다. 내가 체험한 주목할 만한 사례들을 언급하고자 한다. 우리는 새로운 미래를 위해 이러한 사례들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되기 전의 일이다. 이미 고인이 된 포레스트 셔먼(Forrest Sherman, 1896~1951) 미 해군참모총장이 종군기자들과의 비공식 간담회에서 중공군이 무력공격을 감행해 온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물론 합참은 그 점을 심각하게 고려했습니다. 그러나 큰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극동군사령부의 공군을 신뢰합니다. 만약 중공군이 개입하면 우리는 만주의 중공군 보급기지를 반격하고, 중공군의 보급선을 집중 공격함으로써 상황을 우리에게 유리하게 유지할 것입니다.”

이후 의회 청문회에서 드러났듯이 미 극동군사령부는 합참의 승인하에 중공군 개입을 가정한 전시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에 따르면 중공군이 무력공격을 해 오면 우리 공군은 그들의 병참보급을 차단하고 보급품 기지들을 폭파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중공군이 개입하자, 트루먼 대통령은 마음을 바꿔버렸다.

내가 트루먼 대통령이 마음을 바꾼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어느 추운 겨울밤, 함흥~흥남 북쪽 개마고원의 다 쓰러져 가는 판잣집에 마련된 미 해병대사령부에서다. 그때 미 제8군과 미 해병대는 중공군 개입으로 큰 충격을 받고 있었다.

당시 미 해병대 조종사들은 얼어붙은 장진호 인근에서 중공군의 함정에 빠진 미 제1사단 소속 해병대원들을 구출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3만 명이 조금 안 되는 해병대원과 유엔군 잔여 병력이 10만 명 이상의 중공군에게 포위돼 있었다. 일부 비관론자들은 해병들을 살릴 가망이 없다고 단념할 정도로 상황은 최악이었다.

이렇게 위급한 때, 미 해병대 장성이 작전실로 걸어 들어오더니 해병대 조종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말을 했다. <역주: 여기서 장성은 미 해병 제1사단장 올리버 스미스(Oliver Smith. 1893~1977) 소장으로 보임. ‘교수’라는 별명을 가진 독서광이자 미 해병대의 전설적인 인물인 그는 대장으로 예편했음>

“매우 중요한 정보다. 우리(미 극동군사령부를 지칭)가 만주의 중공군 보급기지들을 공격하는 것이 금지됐다. 이뿐만 아니라 워싱턴은 방금 스트레이트마이어(George Stratemeyer, 1890~1969, 당시 미 극동군사령부 공군사령관)의 압록강 다리 폭파계획도 허가하지 않았다. 우리 공군이 출격준비를 완료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도대체 어떻게 싸우자는 것입니까?” 방구석에서 누군가가 물었다.

“나도 모르겠다.” 장군이 말했다. “브래들리(Omar Bradley, 1893~1981, 당시 미 합참의장)가 생각하는 바를 알 수가 없다.”

비록 나중에 의회청문회에서 백악관과 국무성의 주도로 그러한 결정이 내려진 것으로 밝혀졌지만, 당시에는 미 합참의장에 대한 상당한 반발이 있었다. 어느 육군 지휘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브래들리 합참의장과 반덴버그(Hoyt Vandenberg, 1899~1954, 당시 미 공군참모총장)가 왜 기본 방침들을 변경하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그들이 사태를 충분히 더 파악했어야 합니다. 맙소사, 같은 일이 유럽에서 일어났다고 상상해 보세요. 라인강 건너편의 독일군 보급기지들과 증원 병력들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공중폭격 계획을 세웠다가 발지전투(역주: 1944년 12월 시작된 독일군 최후의 대공세. 연합군이 독일군 보급기지를 공격해 승리)가 한창 진행 중에 공격을 금지시키고, 더구나 독일군 보급품과 병력이 건널 다리들을 그대로 두라고 공군에게 명령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중공군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워싱턴 당국은 나진과 같은 북한 내륙의 지리적 거점들에 대한 공격을 금지했다. 나진이라는 도시는 러시아인들이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 탱크와 다른 중장비들을 해상으로 수송할 수 있는 항구도시다.

나진에 대한 폭격이 허용된 것은 거의 1년이 지나서였다. 나진에 대한 폭격이 이뤄지자 이제 영국 의회가 야단이 났다. 미국 지도부가 극동에서 무모하고 도발적이라고 비난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의 ‘성조지(Stars and Stripes)’는 영국 의회의 항의 뉴스를 보도했지만, 한국에 파병된 미국 장병들의 영국 의회에 대한 볼멘 논평들은 싣지 않았다. 사실 영국 의회의 비난을 이해 못하겠다는 반응은 한국 내 미군들뿐만 아니라 영국군에게도 팽배해 있었다.

북한 나진지역 폭격에 대한 영국의 항의가 미국에 전달될 당시, 나는 한국에서 영국군 고위 장교와 이 문제에 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가 내게 들려준 매우 인상 깊었던 얘기를 여기서 소개한다.

“나는 물론 군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우리 정치인들과 항상 견해를 같이 하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미 국무부는 동맹국들의 압력에 대해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어요. 한국의 경우를 보세요. 태평양에 긴 경계선을 가진 미국으로서는 극동지역에 중대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어요. 이점에서 영국과는 다릅니다. 강대국은 동맹국들이 100%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국익을 위해 조치를 취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영국군 고위 장교는 말을 이어 갔다.

“보세요.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어땠어요. 우리 영국은 미국이 나몰라라 하고 있었지만, 전쟁에 뛰어든 것 아닙니까? 만약 그때 영국이 ‘미국이 우리와 함께하지 않는 한 이 문제에 끼어들지 않을 거야’라고 했다면 사태가 어찌 되었을까 궁금합니다. 내가 미국인이라면, 영국 정치인들이 미국인들을 무모하다거나 도전적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흥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비난들은 지혜와 통찰과는 상관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그런 비난들은 대중들의 표를 얻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영국인들은 폭탄이 떨어질 때까지 크리켓 게임을 즐기는 전통이 있답니다. 군사적인 관점에서 이러한 국민성은 문제가 많습니다. 나치가 독일을 지배하고 있을 때, 우리는 히틀러의 행동에 대해 그리 놀라지 않았습니다. 당신도 기억하겠지만 심지어 우리는 1935년에 영독 해군협정을 맺음으로써 나치가 잠수함들을 다시 건조하도록 했고, 우리는 거의 몰락의 단계까지 몰렸었습니다. 또한 미국인들은 뮌헨협정(역주: 1938년 9월 유럽 열강들이 독일의 체코 영토 일부 편입을 승인)을 체결한 후 ‘우리 시대의 평화’를 예언했던 사람이 바로 영국 수상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의 지성인들은 영국이 독특한 역사적인 상황에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줄 의무가 있습니다. 영국은 상대를 제압할 탱크도, 총기도, 항공기도 없는 상황에서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시간적 여유가 있었고, 미국의 지원을 받았기에 전쟁을 성공적으로 치렀습니다. 영국은 실수를 하고도 혹독한 대가를 치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미국인들에게 우리가 누렸던 것과 같은 실수의 여지를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은 일단 위기에 처하면 의지할 수 있는 또 다른 강대국이 없거든요.”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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