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의 개입
· 1950년 10월 14일 중공군 압록강 건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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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의 중공군 포로를 심문하는 미군 해병대원들.[출처:War In Korea] |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탈환은 북한 육군을 파멸에 이르게 했다. 유엔군은 북쪽에서 적의 주요 보급로를 차단하고, 남쪽으로부터 맹렬한 기세로 공격함으로써 적을 붕괴시켰다. 북한은 유엔의 승리를 저지하기 위해 외부의 도움을 필요로 했고,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 돌격해 왔다.
중공의 개입 가능성은 트루먼 대통령이 6·25전쟁에 미국 공군을 파병하는 순간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 시기는 맥아더 장군을 포함해 미 고위 장성들에게 완전히 의외였다. 그들은 중공군이 공격해 온다면 한여름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었다. 그런데 왜 모택동은 우리가 화력을 증강할 때까지 기다렸을까? 가장 설득력 있어 보이는 설명은 북한이 자력으로 우리를 이길 수 있는 희망이 보이는 한 중공은 전쟁과 거리를 두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희망은 성공하기 일보 직전까지 갔으나, 인천상륙작전으로 갑자기 전쟁의 판도가 바뀌어 버렸다.
맥아더 장군이 한국에서 군사작전을 최단 기간 내에 끝내려고 했던 이유 중의 하나도 중공의 개입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는 빨리 진격해 중공이 유엔의 승리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확전을 막으려 했다. 이 때문에 그는 미 합동참모본부가 인천상륙작전을 10월까지 연기하도록 촉구했으나 이를 거부했다.
유엔군이 38선을 넘기 전인 1950년 10월 초, 중공의 주은래 총리는 북경 라디오 방송을 통한 성명에서 중공이 언제나 조선인민의 편에 설 것이며, 그들의 조선반도 해방을 지원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주은래의 성명에 함축된 개입 위협에도 불구하고, 또한 여러 나라에서 전진을 멈추라고 은밀히 촉구했음에도 맥아더는 10월 11일 미군을 북한지역으로 진격시켰다. 이러한 결정은 전적으로 유엔 결의안에 따라 공식승인을 얻은 것이었고,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 그의 임무를 수행하는 일이었다.
또한 중공의 개입 여부는 미군이 여기서 멈추느냐 저기서 멈추느냐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이 미국의 공식 의견이었다. 이러한 견해에 대한 증빙자료로 중공의 여러 성명이 인용됐다. 유엔주재 중공대표는 미국이 한반도 어디에 잔류하든 반대한다고 선언했다. 또한 중공은 전쟁 초기부터 미국의 개입을 비난했고, 북경 라디오 방송은 아시아를 비공산주의자들로부터 해방시킬 것이라고 공언했다.
38선을 넘기 전에 맥아더 장군은 방송을 통해 북한에 두 가지를 촉구했다. 하나는 항복하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한반도에 관한 유엔 결의안을 수용하라는 것이었다. 북한은 이러한 제안들을 단호히 거절했다. 유엔군이 38선을 넘기 전에도 한반도에는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중공군이 있었다. 그러나 중공군 주력부대가 압록강을 넘기 시작한 것은 10월 14일 밤이었다.
이에 맥아더 장군은 당시 새로운 전쟁에 직면하게 됐다는 공식성명을 발표하면서, 적들이 만주지역에 집결한 대규모 병력 지원을 받을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는 ‘전쟁을 끝내기 위한’ 대공세를 지시해 큰 물의를 빚었다. 그는 자신이 경고했던 바로 그 함정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는 비난을 받았다.
대공세는 인천상륙작전과 같은 도박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했지만 대공세는 실패했다. 대공세 전에 우리는 상대할 적의 규모나 성격에 대한 분명한 정보가 없었다. 그런데 왜 맥아더가 자신의 경고도 무시했을까? 그는 중공군의 참전이 상징적인 의미일 뿐이라는 데 패(牌)를 걸었다. 즉, 그는 중공이 북한을 돕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보다 양국 간의 조약을 형식적으로 이행하기 위해 파병한 것으로 믿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아군 공군의 근접지원 능력도 과대평가했다. 맥아더는 미 공군이 북쪽에서 적의 보급로를 성공적으로 차단하면, 적의 병력 보강은 급격히 줄어들 것이며 필수적인 군수물자가 현저히 제한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맥아더가 전쟁을 실제로 끝내기 위한 대공세보다 중공의 의도를 최종적으로 시험하는 공격을 했었다면 확실히 더 나았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맥아더 장군은 나중에 사석에서 그러한 낙천적인 판단을 했던 것이 잘못이었음을 시인했다.
어쨌든 유엔군의 공격은 중공의 육군 ·공군의 힘의 실체가 드러나게 했다. 그들의 병력은 30개 사단 이상이나 됐다. 중공의 반격으로 우리는 한 달 만에 북한으로부터 철수했다. 이 기간 중 서방세계는 끔찍할 정도의 불화의 모습을 보였다. 중공을 비난하기보다 중공과의 전쟁을 회피하기 위해 우리 군 내부에서 비난받을 책임자를 찾기 위해 광분하는 것 같았다. 물론 맥아더가 호된 시험대 위에 올려졌다. 인천상륙작전으로 군의 천재라는 찬사를 받던 그가 이제는 미국의 일부 언론으로부터 군사적으로 무능한 인물로 비난받는 처지가 됐다.
맥아더에 대한 빗발치는 비난은 그가 공인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희생이었다. 그는 자신의 전설이 쳐 놓은 덫에 걸렸다. 고매하고 빈틈없으며 신화적인 인간을 포획하는 함정에 빠진 것이다. 세계는 그를 보통사람이면 용서를 했겠지만, 신화적인 인물로 생각했기 때문에 용서할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맥아더 장군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한다.
나는 그와 여러 번 대화를 나눌 수 있었는데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그는 사심 없는 국가관을 지닌 완전한 인물이다. 나는 비록 중공군의 개입으로 우리가 북한에서 후퇴했지만 맥아더로부터 역사상 위대한 지휘관의 하나라는 명성을 빼앗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군사적인 천재라 하더라도 일단 중공이 공격하기로 결정한 이상, 우리가 상당히 멀리 후퇴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우리 군도 처음부터 중공이 최고의 군대를 파병해 힘으로 개입하면 달아나기 시작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유엔군의 후퇴는 미국 역사를 반전시킨 중요한 사건들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싸우면서 후퇴함으로써 미군의 역사에 영웅적인 이야기를 하나 더 보탰다. 1950년 겨울, 한반도 북쪽의 얼어붙은 땅 유담리에서 미 해병대가 적의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온 것은 전투병들에게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도록 고무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준 상징적인 전과(戰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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