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동맹 한국인들
· “한국군 장병 포화속 보여준 용기 찬사”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북진을 거듭하고 있던 국군장병들이 1950년 11월 말 부대순시차 전선을 찾은 신성모 당시 국방부장관의 연설을 듣고 있다.[국방일보 DB]


우리의 동맹 한국인들의 능력은 군인이거나 정치인이거나를 막론하고, 거의 6·25전쟁이란 주제만큼이나 논쟁의 여지가 많았다. 전쟁 초기에 한국 군인들이 극도의 혼란 속에 남쪽으로 후퇴함으로써 북쪽으로 진군하는 미군의 진로를 막았기 때문에 미군은 한국 군인들에 대해 불쾌한 감정을 품었었다.

또한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한국군은 거의 해체되다시피 해 10만 명의 병력이 2만 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많은 한국군 장병은 옷을 갈아입고 민간인으로 변신해 남쪽으로 향하는 피란민 대열에 합류했다. 그러나 미군의 노력으로 10일간의 특수훈련교육 시스템이 마련됐다. 신병들은 9회의 사격훈련을 받았고, 카빈총·박격포·기관총 등의 작동법도 배웠다. 늦여름쯤에는 한국군 규모가 15만 명 이상으로 증원됐다. 초가을에는 많은 한국군 부대들이 미군 사단들에 편입됐다. 이후 미군 장교들은 한국군 장병들이 포화 속에서 보여준 용기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한국군의 전쟁 초기 전투능력은 천차만별이었다. 예컨대 옹진반도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버텨낸 한국군 사단이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단은 겁을 먹고 도망쳤다. 한국군은 강한 장교단을 양성할 시간이 충분치 못했고, 대부분 미 점령군이 남기고 간 별 볼일 없는 무기들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만일 북한군이 외세의 도움 없이 단독으로 남침을 감행했었더라면, 한국군은 그들을 국경에서 격퇴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련제 무기와 소련의 지휘를 받는 북한군을 맞아 싸우기에는 한국군의 역량이 부족했다. 더구나 북한 침략군은 중공 팔로군 출신의 조선족 병사들을 뽑아 전력을 강화해 15개 사단 이상이 됐다. 게다가 1000대 이상의 탱크를 보유하고 있었다.

전쟁 중에 한국군이 미국의 장비를 공급받은 이후 사정은 크게 개선됐다. 한국군 장성이 지휘하는 사단에 소속된 미국 탱크병들은 덩치가 작은 한국군 병사들을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그들은 한국군 장병들이 적의 사격을 받으면서도 지뢰가 매설된 8마일이나 되는 길을 확보했다면서, 이런 위험천만한 일을 싫은 내색하지 않고 즐거운 표정으로 감행한 한국군을 극찬했다.

한국군이 일급 장교들을 충분히 보유하지 못하고, 보잘것없는 무기를 갖고 전쟁에 뛰어든 주된 이유 중의 하나는 갈팡질팡했던 미국의 외교정책 때문이었다. 미국은 1949년 여름 한국 주둔 점령군의 마지막 부대를 철수시켰다. 미군 철수는 이승만 대통령의 격렬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감행됐다.

당시 미국은 군사적으로 한국에 대해 어정쩡한 태도를 보였다. 전력을 다해 한국을 후원할 태세가 돼 있지 않았으나, 한국을 완전히 포기할 준비도 돼 있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 늦게 한국군을 훈련시키기 시작했고, 알량한 군 장비를 제공했던 것이다.

북한군의 침략을 받았을 때 한국은 맥아더 장군의 지휘에서 벗어나 있었다. 나는 이 사실이 강조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시 한국보호의 책임은 미숙한 미 국방부의 무경험자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  한국경제가 물가상승 등 혼란했던 것도 일부 미국인들에게 한국을 구제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계속 미 경제협력처(ECA)의 자금을 한국에 퍼부은 것은 이율배반적인 행동이었다. 어쨌든 1950년 전후에 한국의 경제상황은 눈에 띄게 개선돼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1950년 4월 중순, 물가는 비교적 안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유통되는 화폐량이 급격히 줄었고, 국가 예산도 균형을 유지하게 됐다.

이렇게 볼 때 한국의 경제안정 기조 강화가 공산주의자들로 하여금 남침 시기를 1950년 6월로 결정하게 만든 요인 중 하나였다고 볼 수도 있다. 이들은 한국이 경제적으로 강력한 국가로 되기 전에 행동에 옮길 필요가 있었다. 한국 정치에 관해서 말하자면, 미국 언론계의 아시아 전문가들이 한국을 경찰국가라고 언급하는 것을 자주 듣는다. 나는 북한군 남침 전에 꼭 한 번밖에 한국을 방문하지 못했었기 때문에 한국 전문가는 아니다. 그러나 나는 제2차 세계대전 후 4년 동안 베를린·바르샤바·프라하 등 철의 장막 이면을 체험한 경찰국가 전문가다.

그런 나의 시각에서 한국은 경찰국가가 결코 아니다. 물론 서양식 민주주의 실현방법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한국 경찰은 일제에 의해 훈련을 받아 야만적이었고, 선거에 개입했다는 의혹도 있다. 그러나 내가 직접 목격한 1950년 5월의 한국 총선은 1947년 1월 폴란드에서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질서정연하게 치러진 비밀투표였다. 또한 6·25전쟁 전에 한국 국민의 자유는 증가 추세는 느렸지만, 분명히 신장되고 있었다. 반면 내가 읽거나 본 것에 따르면, 폴란드에서는 개인적 자유가 급격히 제한되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단원제 국회를 갖고 있다. 가장 영향력 있는 공무원은 존경할 만한 이승만 대통령이다. 그는 독재적인 기질을 지녔지만, 진정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을 가진 인물로 보였다. 그는 한국 국민들을 위해 민주적인 방식의 필요성을 믿고 있었으나, 당면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비민주적인 편법을 자주 동원했다.

나는 그가 자신을 동양의 윈스턴 처칠과 같은 인물로 여겼다고 생각한다. 그는 삶의 대부분을 망명생활로 보냈기 때문에 영국과 미국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여러 해 동안 이승만은 한국의 독립을 위해 해외에서 투쟁해 온 많은 애국지사의 지도자였다. 내가 이승만 대통령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6·25전쟁의 승리가 임박한 것처럼 보였던 1950년 9월의 화창한 가을날이었다. 자그맣고 마른 체구인 그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파였으며, 목소리는 떨리고 힘이 없었다. 그러나 이날 그가 들려준 말을 나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이번에 우리가 학습했듯이 당신의 정부도 공산주의자들과의 타협이란 없다는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타협이란 언제나 시간을 벌기 위한 수단이자, 상대가 의심하지 않도록 달래는 속임수인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의 속셈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당신들은 준비가 너무 늦어져 그들의 다음 번 공격을 막아내지 못할는지도 모릅니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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