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서의 대담한 도박 · 맥아더 장군, 상륙작전을 감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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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을 에워싸고 있는 방파제를 오르는 미 해병대원들. [출처:War In Korea] | 맥아더 장군은 트루먼 대통령의 미 지상군 파병 결정을 인지한 직후 상륙작전을 감행하기로 마음을 굳혔다고 한다. 그는 전쟁이 카드놀이와 같아 힘의 우위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전략적 판단을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유엔군의 해군과 공군력의 강점을 이용해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작전이 수적으로 우세한 적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보았다.
맥아더가 인천을 택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 보좌관들이 인천상륙이 불가하다고 느낀다면, 적들도 필경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둘째, 미군 정보당국으로부터 적의 방어가 가장 취약한 항구가 인천이라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종군기자들에게 인천상륙작전은 홍보의 역사에서 가장 큰 혼란 중의 하나로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도쿄 프레스클럽 주변에서는 인천상륙작전이 개시 몇 주 전에 이미 알려졌기 때문에 ‘누구나 다 아는 작전’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나는 부산항에서 수송선을 타고 인천으로 향했다. 인천에 도착하는 데는 4일이 걸렸다. 인천상륙작전에는 260척의 배가 참여했다. 내가 탄 수송함에 앞서 6척의 순양함, 6척의 항공모함을 포함해 60척의 전함이 먼저 출발했다.
상륙은 세 단계로 실시될 예정이었다. 첫 째, 해병부대가 월미도를 강습하기로 돼 있었다. 둘째, 해병대원들은 인천의 심장부인 적색해안과 인천 남쪽의 방파제가 있는 청색해안을 공격하기로 예정됐었다. 셋째, 해병부대는 적색해안 바로 뒤쪽의 고지를 점령하고, 인천 동쪽 교외로 밀고 들어갈 예정이었다. 특수훈련을 받은 한국 해병대는 미군의 공격을 피해 달아나는 적군을 섬멸하는 임무를 수행하기로 돼 있었다.
나는 적색해안을 공격하는 부대에 속하게 됐다. 내가 탈 소형 상륙주정(보트)에는 박격포 1문, 소총부대원, 사진사 1명, 나를 포함한 종군기자 몇 명을 포함해 38명이 타게 됐다. 나는 수송함에서 화물그물을 타고 내려가 마지막으로 보트에 올랐다.
우리는 해협 안쪽으로 9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공격 통제함을 향해 출발했다. 귀가 찢어지는 것 같은 끔찍한 경험이었다. 20분 후에 우리는 월미도를 선회했다. 적의 총탄이 쏟아지는 가운데 우리는 방파제로 다가갔다. 보트가 강하게 부딪치며 방파제에 닿자 해병대원들이 뱃머리를 벗어나 방파제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사진사가 자신은 일을 끝냈다면서, 보트가 수송함으로 회항할 때 곧장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일순간 나도 그와 함께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또다시 적의 사격이 시작돼 돌아가려는 마음을 접고, 보트에서 빨리 내리기로 결심했다. 나는 보트에서 뛰어내려 방파제 경사면의 바위 위에 배를 바짝 붙이고, 뱀처럼 꿈틀대며 경사면 최상단 바로 아래 움푹 파인 곳까지 기어 올라갔다.
해병대원 한 명이 위험을 무릅쓰고 방파제 위로 올라갔다가 화급하게 다시 뛰어 내려왔다. 이 과정에서 그의 발 하나가 내 엉덩이를 세게 밟았다. 내 엉덩이는 풍만하긴 했지만, 통증이 왔다.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봐요, 아무리 급해도 정신 좀 차려요.” 그는 재빨리 발을 치우며 사과했다. 어조로 보아 그는 자기가 여자의 둔부를 밟았다는 것을 알아차린 눈치였다. 헬멧과 외투로 훌륭하게 위장했기 때문에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안 것은 그가 유일했다고 생각한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해가 지기 시작했다. 해병대원들이 입은 초록색 군복 위로 노란색 황혼이 비치자 할리우드 영화사들도 감히 만들어낼 수 없는 찬란한 빛의 향연이 연출됐다. 사실 지는 해가 불타는 부두의 진홍색 연무와 어우러져 빚어내는 광경은 영화팬이 보았더라도 장관이었을 것이다.
저녁 7시쯤 우리는 해안을 장악했고, 소형 무기들의 사격도 미미해졌다. 나와 종군기자 일행은 기사송고를 위해 맥킨리 호로 갔다. 그런데 함장이 남자 종군기자들의 승선은 허용했으나, 내게는 범죄자 취급을 했다. 함장은 도대체 내가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됐는지 핏대를 올리며 물었다. 마침 배에 승선해 있던 도일 제독의 도움으로 승선이 가능했다.
이후 나는 이 배의 갑판에서 부대원들과 잤다. 나는 불평하지 않고 꾹 참고 견뎠다. 그러나 남자 기자들이 나를 갑판 위에 남겨 두고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버터와 우유를 넣어 볶은 계란을 맛있게 먹으러 갈 때는 우리 해군에게 축복이 있으라고 빌어주는 허세를 부리고 싶지는 않았다.
상륙작전이 성공한 다음날 아침 나와 동료기자 한 명은 해병대로부터 지프를 제공받았다. 아직 불타고 있는 도시를 통과하면서 모든 것이 우리 수중에 들어온 것을 실감했다. 수많은 시민이 공산주의자로 오해받지 않을까 두려워하면서 거리로 몰려 나왔다. 이들은 미군 차량이 지날 때 정성을 다해 손을 흔들거나 인사를 했다.
맥아더 장군의 대담한 도박은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앞으로 며칠 후면 내가 마음속으로 다짐한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약속이란 바로 서울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쉽지도 유쾌하지도 않은 길이었다. 미 해병대는 서울로 가는 길을 피 흘리며 힘들여 개척해 나갔다. 내가 해병 제1연대 찰리 중대를 따라 서울 중심의 성당을 점령하던 날은 특히 가혹했다. 의무 차량이 우리 앞으로 질주하다가 폭파되는 것을 목격했다.
이후 조심스레 차를 몰아 서울의 어느 성당에 도착했다. 성당은 아수라장이었다. 십자가는 제단에서 떼어졌으며, 모든 종교적 상징들은 건물에서 제거돼 있었다. 스탈린과 김일성 얼굴이 그려진 대형 포스터들이 벽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또한 벽에는 미군들이 천진난만한 어린애들이나 부녀자들을 살해하고 있는 장면을 그린 포스터들도 붙어 있었다. 성당은 공산당 본부로 사용된 것이 분명했다.
건물 밖에는 종이 걸려 있었다. 갑자기 네 명의 한국인이 타종하기 시작했다. 종소리는 소란했던 전투의 종료를 알리듯 청아하게 울렸다. 불타는 도시에서 보기 드문 사랑스러운 소리였다. 얼마 있다가 종을 울린 사람들이 미군에게 서둘러 달려가서는 말을 건넸다. 통역관은 그들의 말을 해석했다. “당신들에게 감사의 표시로 종을 울렸습니다.” 우리는 눈물이 핑 돌도록 승리에 도취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일시적인 승리가 될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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