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포위됐어요” 수원을 뒤로하고 …
맥아더 사령관 전용기에서 그와 단독인터뷰를 한 다음날인 6월 30일,
나는 도쿄에서 수원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다시 몸을 실었다.
그것이 나의 마지막 수원 방문길이었다.
비행기에서 막 내렸는데, 심술궂게 생긴 미 육군대령이 나를 맞았다.
대령은 다짜고짜 말을 걸어왔다. “젊은 아가씨, 되돌아가야만 합니다.
여기는 당신 같은 여자가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
위험한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나는 조금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걱정에 대해 마음속에 담아 뒀던
답을 쏟아냈다. “위험하지 않다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위험한 사태가 뉴스이며, 뉴스를 수집하는 것이 나의 일입니다.”
대령에게 답변하고 있을 때 지프 한 대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놀랍게도 미 군사고문단 라이트 대령의 전속부관이었다.
“헤이, 중위님, 사령부까지 태워다 주시겠어요?”
지프가 내 앞을 휙 스쳐지나가는 사이에 나는 대령의 말을 들은 척도 않고
날쌔게 뛰어 올라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24시간밖에 안 됐는데 수원에 있던 임시 미군사령부 위치가 바뀌어 있었다.
미 군사고문단 동료들은 도쿄에서 파견된 영관급 장교들에게 업무를 인수인계
하고 있었다. 군사고문단 장교들은 친절했으나, 도쿄에서 온 장교들은
극히 사무적이고 고압적이었다.
저녁 6시, 임시사령부 건물 내에서 장교들이 나지막한 소리로 환담하고 있었다. 군사고문단 그린우드 소령이 내게 다가와 조언했다.
“사령부에서 멀리 벗어나지 마세요. 사태가 또다시 악화되는 것 같아요.”
나와 동료들은 회의실 가까이에서 서성거렸다. 한국과 미국군 장교들로부터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였다. 그때 갑자기 귀를 째는 소리가 들렸다.
“비행장으로 가시오.” 우리 세 명의 기자는 서로 쳐다봤다.
누가, 왜 공항으로 가는 것일까? 우리는 거의 동시에 펄쩍 뛰어 건물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마침 회의실 안쪽에서 문을 향해 전력을 다해 달려오는 나이
지긋한 대령을 만났다. 내가 그의 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속도를 줄여야만 했다. “왜 그래요? 뭔가 잘못됐다면, 우리 모두가 남쪽의 대전으로 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나는 재빨리 물었다. 대령은 오페라 가수처럼 팔을 공중으로 높이
내뻗으면서 다급히 외쳤다. “우리가 포위됐어요, 포위됐어.”
회의가 갑자기 중단된 이후 5~6분밖에 경과하지 않았다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일이 벌어졌다. 특파원 동료들은 카빈총을 손에 들고 나와 함께 지프에
꽉 끼어 앉았다. 젊은 병장 한 명도 호위병으로 동승했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타자기와 칫솔뿐이었다. 서울에서 처음으로 후퇴할 때 꼭 필요한 타자기와
칫솔을 빼고는 다른 사물을 모두 포기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우리는 수원 공항으로 갔다. 그러나 공항에 도착하니 갑자기 공항을 사수하려던 계획이 변경돼 다시 대전으로 후퇴하게 됐다. 밤 11시쯤 우리는 남쪽으로 향하는 미군 행렬에 끼어 비포장도로를 덜컹거리며 달렸다. 마침 장마가 시작됐다.
한국의 밤은 여름인데도 싸늘했다. 그런데 비까지 매정하게 쏟아지니
기온이 뚝 떨어져 마치 샌프란시스코의 안개 낀 겨울 새벽 같았다.
도로는 미끄러운 흙탕길로 변했고, 강물은 엄청나게 불어났다.
갑자기 차가 심술궂게도 진흙탕 속으로 미끄러져 도랑에 빠졌다. 우리는
지프를 길 위로 끌어 올리려고 사투를 벌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힘이 부족하다는 죄책감을 느낀 나는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한국인 가정을 찾아 나섰다.
마침 새벽 5시쯤 나는 농가로 들어갔다. 마루 위에는 여러 명의 사람이 큰 대자로 누워 있었다. 그들은 전혀 놀라는 기색 없이 조용한 태도로 나를 맞았다.
내 얘기를 들은 후 성인 남자 2명이 나를 따라 왔다.
그들의 늠름한 근육은 차를 들어 올리는 데 훌륭하게 기여했다.
이들은 수고에 대해 그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보답할지 협의하고 있을 때 벌써 돌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새벽 6시쯤 대전에 도착해 처치 장군을 만났다.
“오늘 아침 미군 2개 중대가 한국으로 공수돼 옵니다.”
“아, 이제 시작이구나, 미국이 전쟁 중이야.”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그에게
물었다. “전쟁 개입이 너무 늦은 것 아닙니까?” “분명히,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인들이 이곳에 도착하면 사태가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믿을 만한 사람들을 갖게 될 것입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한국인들과 일하면서 정말 혼났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처치 장군은 나중에 한국 군인들의 품격에 대한 이러한 그의 견해를
바꿨으며, 많은 한국 군인을 자신의 부대인 미 육군 제24 보병사단에 편입시킨 최초의 인물이었다. 인터뷰를 끝내고 기사 송고를 위해 무초 주한미국대사의
대전 집무실로 갔다. 그러나 그곳에는 전화가 없었다. 대사는 대전역 근처의
미 공보원에서 몇몇 종군기자들이 전화를 사용해 왔다고 알려줬다.
도착해 보니 서로 통신하려고 아우성이었다. 나는 6·25전쟁 기간 내내 기사를 써서 송고하는데, 단 한 번도 만족해본 적이 없다. 6·25전쟁 취재는 이런 상황 아래서 이뤄졌다. 그날 아침 기사를 송고한 후 나는 동료 특파원과 대사 집무실로 돌아가려고 보슬비가 내리는 거리로 나왔다. 마침 우리 앞을 지나는 지프를 세웠다. 차에는 유별나게 잘 차려 입고, 영어를 꽤 잘하는 젊은 한국군 장교가 타고 있었다. 내 동료는 장교와 뒷좌석에 탔고, 나는 앞 좌석 운전기사 옆에 앉았다.
기사를 무사히 송고했다는 안도감에서 활기를 찾은 내 동료는
한국군 장교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다정스럽게 치며 말했다.
“이봐요, 친구, 아군에서 싸우는 겁니까?” 장교의 답은 정중했다.
“글쎄요, 싸울 계획입니다. 지금 막 포트 베닝(역주: 미국 조지아 주 포트 베닝에 있는 미국 최대의 육군 군사훈련소)에서 오는 길입니다.”
동료는 그의 어깨를 다시 한번 치며, 유쾌하게 말했다.
“좋아요, 친구, 근데 뭐 하는 분이신지?” 장교가 대꾸했다.
“한국군의 방어를 재편하는 일을 할 겁니다. 실은 방금 한국군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받았소. 한국군 소장이며, 이름은 정일권이오.
다음 계속
6·25전쟁 종군 취재 중인 마거리트 히긴스 기자가 타자기를 이용해 기사를 작성하고 있다. [출처: War In Korea] |
맥아더 사령관 전용기에서 그와 단독인터뷰를 한 다음날인 6월 30일,
나는 도쿄에서 수원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다시 몸을 실었다.
그것이 나의 마지막 수원 방문길이었다.
비행기에서 막 내렸는데, 심술궂게 생긴 미 육군대령이 나를 맞았다.
대령은 다짜고짜 말을 걸어왔다. “젊은 아가씨, 되돌아가야만 합니다.
여기는 당신 같은 여자가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
위험한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나는 조금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걱정에 대해 마음속에 담아 뒀던
답을 쏟아냈다. “위험하지 않다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위험한 사태가 뉴스이며, 뉴스를 수집하는 것이 나의 일입니다.”
대령에게 답변하고 있을 때 지프 한 대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놀랍게도 미 군사고문단 라이트 대령의 전속부관이었다.
“헤이, 중위님, 사령부까지 태워다 주시겠어요?”
지프가 내 앞을 휙 스쳐지나가는 사이에 나는 대령의 말을 들은 척도 않고
날쌔게 뛰어 올라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24시간밖에 안 됐는데 수원에 있던 임시 미군사령부 위치가 바뀌어 있었다.
미 군사고문단 동료들은 도쿄에서 파견된 영관급 장교들에게 업무를 인수인계
하고 있었다. 군사고문단 장교들은 친절했으나, 도쿄에서 온 장교들은
극히 사무적이고 고압적이었다.
저녁 6시, 임시사령부 건물 내에서 장교들이 나지막한 소리로 환담하고 있었다. 군사고문단 그린우드 소령이 내게 다가와 조언했다.
“사령부에서 멀리 벗어나지 마세요. 사태가 또다시 악화되는 것 같아요.”
나와 동료들은 회의실 가까이에서 서성거렸다. 한국과 미국군 장교들로부터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였다. 그때 갑자기 귀를 째는 소리가 들렸다.
“비행장으로 가시오.” 우리 세 명의 기자는 서로 쳐다봤다.
누가, 왜 공항으로 가는 것일까? 우리는 거의 동시에 펄쩍 뛰어 건물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마침 회의실 안쪽에서 문을 향해 전력을 다해 달려오는 나이
지긋한 대령을 만났다. 내가 그의 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속도를 줄여야만 했다. “왜 그래요? 뭔가 잘못됐다면, 우리 모두가 남쪽의 대전으로 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나는 재빨리 물었다. 대령은 오페라 가수처럼 팔을 공중으로 높이
내뻗으면서 다급히 외쳤다. “우리가 포위됐어요, 포위됐어.”
회의가 갑자기 중단된 이후 5~6분밖에 경과하지 않았다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일이 벌어졌다. 특파원 동료들은 카빈총을 손에 들고 나와 함께 지프에
꽉 끼어 앉았다. 젊은 병장 한 명도 호위병으로 동승했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타자기와 칫솔뿐이었다. 서울에서 처음으로 후퇴할 때 꼭 필요한 타자기와
칫솔을 빼고는 다른 사물을 모두 포기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우리는 수원 공항으로 갔다. 그러나 공항에 도착하니 갑자기 공항을 사수하려던 계획이 변경돼 다시 대전으로 후퇴하게 됐다. 밤 11시쯤 우리는 남쪽으로 향하는 미군 행렬에 끼어 비포장도로를 덜컹거리며 달렸다. 마침 장마가 시작됐다.
한국의 밤은 여름인데도 싸늘했다. 그런데 비까지 매정하게 쏟아지니
기온이 뚝 떨어져 마치 샌프란시스코의 안개 낀 겨울 새벽 같았다.
도로는 미끄러운 흙탕길로 변했고, 강물은 엄청나게 불어났다.
갑자기 차가 심술궂게도 진흙탕 속으로 미끄러져 도랑에 빠졌다. 우리는
지프를 길 위로 끌어 올리려고 사투를 벌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힘이 부족하다는 죄책감을 느낀 나는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한국인 가정을 찾아 나섰다.
마침 새벽 5시쯤 나는 농가로 들어갔다. 마루 위에는 여러 명의 사람이 큰 대자로 누워 있었다. 그들은 전혀 놀라는 기색 없이 조용한 태도로 나를 맞았다.
내 얘기를 들은 후 성인 남자 2명이 나를 따라 왔다.
그들의 늠름한 근육은 차를 들어 올리는 데 훌륭하게 기여했다.
이들은 수고에 대해 그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보답할지 협의하고 있을 때 벌써 돌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새벽 6시쯤 대전에 도착해 처치 장군을 만났다.
“오늘 아침 미군 2개 중대가 한국으로 공수돼 옵니다.”
“아, 이제 시작이구나, 미국이 전쟁 중이야.”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그에게
물었다. “전쟁 개입이 너무 늦은 것 아닙니까?” “분명히,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인들이 이곳에 도착하면 사태가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믿을 만한 사람들을 갖게 될 것입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한국인들과 일하면서 정말 혼났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처치 장군은 나중에 한국 군인들의 품격에 대한 이러한 그의 견해를
바꿨으며, 많은 한국 군인을 자신의 부대인 미 육군 제24 보병사단에 편입시킨 최초의 인물이었다. 인터뷰를 끝내고 기사 송고를 위해 무초 주한미국대사의
대전 집무실로 갔다. 그러나 그곳에는 전화가 없었다. 대사는 대전역 근처의
미 공보원에서 몇몇 종군기자들이 전화를 사용해 왔다고 알려줬다.
도착해 보니 서로 통신하려고 아우성이었다. 나는 6·25전쟁 기간 내내 기사를 써서 송고하는데, 단 한 번도 만족해본 적이 없다. 6·25전쟁 취재는 이런 상황 아래서 이뤄졌다. 그날 아침 기사를 송고한 후 나는 동료 특파원과 대사 집무실로 돌아가려고 보슬비가 내리는 거리로 나왔다. 마침 우리 앞을 지나는 지프를 세웠다. 차에는 유별나게 잘 차려 입고, 영어를 꽤 잘하는 젊은 한국군 장교가 타고 있었다. 내 동료는 장교와 뒷좌석에 탔고, 나는 앞 좌석 운전기사 옆에 앉았다.
기사를 무사히 송고했다는 안도감에서 활기를 찾은 내 동료는
한국군 장교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다정스럽게 치며 말했다.
“이봐요, 친구, 아군에서 싸우는 겁니까?” 장교의 답은 정중했다.
“글쎄요, 싸울 계획입니다. 지금 막 포트 베닝(역주: 미국 조지아 주 포트 베닝에 있는 미국 최대의 육군 군사훈련소)에서 오는 길입니다.”
동료는 그의 어깨를 다시 한번 치며, 유쾌하게 말했다.
“좋아요, 친구, 근데 뭐 하는 분이신지?” 장교가 대꾸했다.
“한국군의 방어를 재편하는 일을 할 겁니다. 실은 방금 한국군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받았소. 한국군 소장이며, 이름은 정일권이오.
다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