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2월

 함경남도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국군 전사자 유해 12구가 62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

 

장진호 전투(長津湖戰鬪)

 한국전쟁 중인 1950년겨울 미국 1 해병사단이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임시수도인 강계를 점령하려다

 오히려 장진호 근처의 산 속 곳곳에 숨어있는 중공군 제9병단(7개 사단 병력, 12만 명 규모)에 포위되어

 보급로 차단과 혹한의 동장군으로 가장 힘들고 치열했던 전멸위기를 극복하고

후퇴작전에 성공한 불가사의한 전투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1950년 11월 26일부터 12월 13일까지 진행되었는데

본 전투의 이름의 "장진(長津)" 영어로는 일본어 독음을 따서 "Chosin" 이라고 부르는데

 당시에는

 한국어 지도가 없고

일본어 지도만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

 

미군의 전사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되어 있으며

1950년도 사건 당시

 미국의 뉴스위크지는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 혹평하였지만

당시 이 전투가 얼마나 절박하고 중요했으면 현재 미 육군과 해병대의 전술교본으로 삼고 있으며

"Chosin"타이콘데로가급 이지스 순양함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미 7함대 소속입니다.

.......

 

 "장진호"

 후퇴작전을 통해서

 미 해병1사단은 자신의 10배에 달하는 12만의 중국군 남하를 지연시켰으며

 중국군 12만 명의 포위를 뚫고 흥남에 도착, 흥남 철수를 통해 남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합니다.

흥남 철수는

 193척의 군함으로

군인 10만 명, 민간인 10만 명을 남쪽으로 탈출시킨 사건을 말하는데

미 해병1사단의

이 퇴각작전으로 중국군을 저지함으로써

한국군과 유엔군, 피란민 등 20만명이 남쪽으로 철수할 수 있었으며

서부전선의 미 8군이 중국군을 방어할 수 있게 됩니다.

장진호 전투로 인해 중국군의 함흥지역 진출은 2주간 지연됐고 중국군 7개 사단은 궤멸적 타격을

 받습니다.

 ......

 

1950년 11월 26일부터

 12월 13일까지 17일간의 장진호전투 일지를 살펴봅니다.

......

한국전쟁 당시

활약한 아군 지상군 사단급 부대는

 휴전직전 창설되어 실제로 전투에 투입되지 않았던 부대들까지 합하여 국군이 18개 사단

미군이 9개 사단, 영연방군이 1개 사단입니다.

......


 

 그중에서도

전쟁 기간 중 가장 격정적이었던

 1950년도에

세계 전쟁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부대는 미 해병1사단입니다.

 한국에

파병된 미군 부대 중

본토에서 가장 먼저 달려 온 부대였는데

 낙동강방어전, 인천상륙작전, 원산상륙작전, 장진호전투,흥남철수작전

1950년 한반도 곳곳에서 벌어진 굵직한 전투에 모두 등장하여 인상적인 전과를 남깁니다.

........

 

 

적의

 배후를 강타하여

서울을 탈환한 인천상륙작전은

 미 해병 1사단의 명성을 길이 빛내준 기념비적인 전과입니다.

 하지만..

 전사에는 패배로 기록된 "장진호전투"

세계 전쟁사의 전설로 남는 뛰어난 업적으로 희자되고 있습니다.

 패배라고 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영광으로 남을만한 전투라는 정의로 알 수 있듯이

 "장진호전투" 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내용과 결과보다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

 

 1950.10.26.

동해안 요충지 원산에

미 해병 1사단이 상륙하였지만

 그것은 이미 군사적으로 무의미한 전과가 됩니다.

 기뢰에 막혀 한 달 동안 바다 위를 떠 있을때

국군 1군단이 원산을 점령하고 지나간 이후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함경도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전진하기로 예정되었던 미 해병 1사단은

 미 육군3사단이 원산에 상륙하면

 전선을 인계하고 장진호로 진격하라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습니다.

......

 

 

명령을 받은

미 해병 1사단장 스미스(Oliver P. Smith)는

 갈수록 험해지는 한반도 북부의 지형과 급격히 추워지는 기후상태를 고려할때

보급로를 안정화하지 않고 무작정 앞으로 내달리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합니다.

스미스는 명령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배후를 단속한 후 앞으로 나가다 보니 진격이 늦을수 밖에 없었고

 이것은 조속한 진격을 명령한 미 10군단장 알몬드(Edward Almond)를 화나게 만듭니다.

......

 

비록

11월 초였지만

이미 함경도 산악지대는

 폭설이 내리는 한겨울로 들어섭니다.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하늘을 찌를듯한 사기를 지닌 해병대원들 이었지만

동계 전투경험은 전무하였고

고준산령의 산악지대를 추운 날씨에 진격한다는 것은 상당한 위험부담이 있어

 해병 제1사단장 스미스는 최대한 신중하게 행동을 합니다.

따라서 군단장 알몬드가 아무리 채근하고 독촉해도 진격로 주요 거점마다 병참기지, 비행장 등의

지원 시설을 갖추어 배후의 안전을 확보한 후 전진합니다.

  스미스의 이러한 판단은 얼마가지 않아 최악의 상황에서 기적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됩니다.

.....

 

11월 중순경

 미 해병1사단의 선도 부대는

인공호수인 장진호 인근의 하갈우리(下碣隅里)까지 진격하는데 성공합니다.

 여타 부대에 비해

 상당히 늦은 진격 속도가 됩니다.

 그런데 갑자기 전선의 상황은 상당히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얼마전 10월 25일 등장한 중공군으로 말미암아 전선의 상황이 급변하고 있었는데

 가장 크게 문제가 발생한 곳이

 미 8군의 우익을 담당한 국군 2군단 지역입니다.

.....

 

 

만일..

 이곳이 붕괴된다면

미 8군과 동부전선의 미 10군단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발생하여

 전선이 단절되는데 

 결국은 그렇게 되고 말지만..

따라서 이를 예방하기 위해 가장 가까이 있던 미 해병 1사단에게

 장진호에서 낭림산맥을 넘어 강계방향으로 진격하여 미 8군과 연결하라는 명령이 하달됩니다.

 앞만 보고 공격만 하다가

벌어진 전선의 간격을 막기 위해 내린 고육책입니다.

......

 

 미 해병 1사단은

 7연대가 유담리로, 5연대가 무평리 방향으로 진격을 개시하였으나

 11월 27일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에 저지됩니다.

 그것은 단순한 교전이 아니라

 매복하고 있던 10여 배에 가까운 중공군들이

 쳐 놓은 포위망 안에 미 해병 1사단이 들어와 있던 무시무시한 상황에 처합니다.

 이런 사실이 정찰대에 의해 확인될 겨를도 없이 사방팔방에서 중공군의 공격이 개시됩니다.
......

 

이것은

 미 해병 1사단만이 아니라

전 전선에서 동시에 일어난 상황이 됩니다.

 하지만 미 해병 1사단에게 가해진 압박은 실로 대단합니다.

 장진호 일대에 고립된 2만의 미 해병 1사단을 포위한 것은 12만으로 추산되는 중공군 9병단이었는데

 함경도 일대에 출몰한 중공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미 해병 1사단이 제거되면

그 북쪽에 있던 나머지 미 10군단 소속 부대들은 자동적으로 고립되기 때문입니다.

.....


  미 해병1사단은

미 10군단 전체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포기하기 않고 탈출을 시도합니다.

 그런데 중공군 못지않은 무서운 적이 또 하나 있었는데 밤이면 영하 30도 가까이 내려가는 날씨입니다.

총이 얼어 발사가 안될 정도였다 하니

 수많은 병사들이

처음 겪어보는 무서운 혹한에 노출되어 쓰려져 갔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병사들도 동상으로 손발을 잃게 된 경우가 부지기수였답니다.

 "장진호전투"를 통해

미국은 동계전투 전술을 새롭게 연구하는 계기로 삼습니다.

.....

 

 

철수명령이 하달되고

스미스는 가장 앞서 있던 양 연대를

12월 4일 사단사령부가 있는 하갈우리로 철수시키는데 극적으로 성공시킵니다.

중공군 4개 사단의 집요한 방해와

혹한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부상병과 사상자를 빠짐없이 둘러매고 이룬 놀라운 결과입니다.

 하갈우리에는 4,300여 부상자를 포함한 10,000여명의 병력과 각종 장비가 집결합니다.

이제는

황초령을 넘어

함흥까지 온전히 철수하는것이 남습니다.

......

 
 이때

 군 장비는 유기시키고

병력만 공중으로 철수하라는 제의가 들어오지만

 스미스는 최소한 2개 대대가

 마지막까지 활주로에 잔류해야 하는데 이것은 이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것이고

해병으로써 불명예스러운 행동이라며 일언지하에 거절을 합니다.

단 4,300명의 부상자만 수송기로 공수하기로 하고

 미 해병 1사단은 탈출길에 올랐는데

그들이 장진호에서 써 내려간 위대한 신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
 

 

다행히도

 진격 당시에 곳곳에 확보하여 놓은

보급로와 물류 기지로 미 해병 1사단이 극악한 조건에서 생존할 수 있게 합니다.

 특히 고원의 하갈우리에 만든 임시 비행장은 미 해병 1사단이 살아나게 된 결정적인 생명선이 됩니다.

미 해병항공대의 눈부신 활약이 시작됩니다.

..... 

 

 사단장 스미스는

 "우리는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방향을 바꾸어 공격하는 것이다"

이라는 유명한 훈시를 내렸고

 12월 6일..

 드디어 흥남으로의 철수가 시작됩니다.

해병대원들은 탈출로를 막아대는 중공군을 차례대로 격파하며 앞으로 나갑니다.
유담리와 하갈우리에서

실패를 맛본 중공군은 4개 사단을 황초령 일대에 추가 투입을 합니다.

중국은

미 해병 1사단을 완전히 섬멸할 경우

미국인들이 입게 될 심리적 충격을 잘 알고 있어서 매체를 통해 연일 전황을 선전하였고

 미국 언론들도

철수 과정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세계인이 생중계로 그 과정을 지켜보고 있을만큼 미 해병 1사단의 탈출극은 세기의 사건이 됩니다.

.......

 

추위에 따른

비전투 손실이 많았던 만큼

장진호전투의 환경은 미군 역사상 최악으로 평가됩니다.

그런데 이처럼 미군이 적보다 더 무서워한 혹한은 중공군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후방으로부터의 보급을

 원시적인 수단에만 의존하였던 중공군은

 혹한의 산속에 매복하고 있다가 고립되어 전투력을 상실하곤 하는데

 이것은 압도적 병력으로 포위망을 형성하고도 미 해병 1사단을 격멸하지 못한 이유가 됩니다.

.......

 

 중공군은

미 해병대의 의지에 결국은 제압 당합니다.

 미 해병 1사단은 사투를 거듭하며 황초령을 넘어 12월 11일 흥남에 도착하는데 성공합니다.

 미 해병 1사단은

전사 393명, 부상 2,152명, 실종 76명의 피해를 입었지만

 이에 맞섰던 중공군 9병단의 피해는 전사자만도 25,000명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궤멸된 수준이되고

때문에..

중공군 9병단은 전선에 투입되지 못하고 이후 4개월 동안 부대정비에 매달리게 됩니다.
......


 

 항공철수를

거부한 해병대의 분투는

 막대한 장비와 보급품의 유기를 막는 효과도 가져옵니다.

 물론 물자보다 사람의 생명이 중요하지만

 적들이 유기된 장비를 이용한다면 결국 더 큰 피해를 볼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 해병 1사단의 분투는

 진격해서 고립되어 있던 미 10군단, 국군 1군단을 포함 여타부대들이

안전하게

후퇴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확보합니다.

......

 

더불어

 사상 최대의

인도주의 작전으로 평가받는

 10여만 명의 피난민이 동반 철수에 성공한 흥남철수의 밑거름이 됩니다.

  역사에는 만약이 없지만

만일 중공군 9병단이 후방으로 완전히 빠져 재편을 필요로 할 정도로 타격을 입지 않고

 1.4후퇴를 불러온

 중공군의 제3차 공세에 즉시 참가하였다면..

아찔합니다.

.......


 온라인에서는

 후퇴한 것이니 전략적으로는 패배라 하고

하지만 적에게 더 많은 피해를 입혔으니 전술적으로는 승리라고도 표현합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런 의견도 후퇴를 무조건 패배로 보는 고루한 사고 때문에 나온 해석같습니다.

적에게 더 많은 피해를 안겨주었으므로 전술적 승리라는 정의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미 10군단을 포함한

사상 최대의 인도적인 구조 작전과

중공군 9병단의 전선이탈과 괘멸은 분명한 전략적 승리입니다.  
.....

 

 하지만

장진호전투가

 결코 패배로 볼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Chosin Few" 로 통칭되는 해병 참전용사들 스스로가 자랑스러워하는 전투이기 때문입니다.

기억하기 싫을 만큼

 지옥의 고통을 겪었으면서도

 잊지 않고 자랑스러워하는 전투이기 때문에 장진호전투는 전설로 남습니다.

......

 

 

장진호 전투(長津湖戰鬪)

 작전중에 미군은 총 6,532명의 병력 손실을 입습니다.

6.25전쟁중에 미군에 배속된 카투사로 43.600명이 참전해서 9.000여명이 숨집니다.

이번 송환된

카투사 유해 12구에서

 故김용수.이갑수 일병의 유해만 확인됩니다.

......

 

초신 퓨(Chosin Few)가 조직한

 "장진호 전투 동상 위원회"의 노력으로

장진호 전투의 생존용사 가운데 4,000여 명이 47년 만인 1997년에 비로소 미국 원호청의

동상 후유증 보상을 받게 됩니다.

 그동안 동상 후유증은 보상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는데

고엽제

망령도 생각이나고..

대국이라는 미국의 처세도.. 별수없다 싶습니다.

 

  • 임성혁(240) 2012.05.29 15:06
    장문의 전투사. 잘읽고 갑니다.
    큰일 앞두고 일은 잘진행되는지.......
  • 오충균(413) 2012.05.29 19:28
    역사를 공부한듯 함니다.
  • 김인규(245) 2012.05.30 09:27
    어라??? 사진이 하나도 안열렸네여....ㅉㅉㅉ
  • 임성혁(240) 2012.05.30 10:31
    주계병???쪽바로 하그라.ㅋㅋㅋㅋ
  • 김상준(398) 2012.06.01 17:47
    사진이 안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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